상투적인 단어로 추락한 ‘행복’에 대한 고찰
『갈매기의 꿈』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오른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 그 작품에는 진정한 자유를 전파하며 삶의 의미를 연구했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이 있다. 조나단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뒤 완벽한 비행에 이르러, 마침내 공중에서 사라진다. 많은 사람들은 성자가 된 조나단을 기리며, 한낱 몸뚱이에 불과한 한계에 갇히지 않기로 결심한다. 드넓은 하늘을 날기 위해 태어난 갈매기처럼, 우리 역시 살아가기 위해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것이니까. 진정한 날갯짓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조나단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삶’을 이루기 위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리게 만들었다. 이것은 『갈매기의 꿈』이 탄생한 1970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온 삶의 의미이자 가치였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스스로 채찍질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게도 그 문장은 이 글에 실을 수 없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조나단의 신화가 기괴한 곡예비행을 낳았듯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무조건적인 교육을 추구한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좋은 직업을 가져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도식은 안타깝게도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진정한 삶을 얻기 위한 백퍼센트의 확률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세상이 만들어놓은 기준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굿바이』의 저자 이명인은 보이지 않는 적들이 바로 이곳에 있다고 말한다. 하면 안 되는 것이 분명했던 ‘금기의 시대’는 모두 지나가버렸다. 지금은 모든 것이 가능한 ‘허용의 시대’다. 마치 모든 것이 열려있어 누구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