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최씨 왕조에 대한 궁금증 세 가지
1_창업
최충헌 형제의 쿠데타
쿠데타의 발단, 비둘기 사건│미타산, 이의민 주살│개경, 국왕을 수중에 넣고 | 수창궁, 반쿠데타 진압
집요한 승부사, 최충헌
하급관리에서 군인으로│최우수 지방관으로의 변신│다시 무인으로│최초의 인사발령
문신귀족들이 동조한 쿠데타
반쿠데타의 거점, 수창궁│국왕의 존재│명종 폐위│두 번째 쿠데타의 성공
또 다른 쿠데타, 명종 폐위
반쿠데타의 거점, 수창궁│국왕의 존재│명종 폐위│두 번째 쿠데타의 성공
마지막 쿠데타, 최충수 제거
최충수의 도전│형제의 대립│최충수 제거│홀로 선 최충헌
2_정난
노비들의 동요, 신분해방운동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노비들의 동요│만적의 난│노비와 사병私兵
신라부흥운동
김사미?효심의 난의 잔여세력│경주, 이의민의 잔여세력│진주의 노비 반란│경주 토벌계획│신라 재건 표방│진압군과 반군│김척후의 소환│토벌군의 경주 입성│경주의 쇠퇴
이규보가 증언한 고려 정통성의 위기
반란 진압에 참여한 이규보│전란지에서 보내온 편지 하나│편지, 둘│계속되는 편지│최충헌 정권과 고려의 정통성 문제│남북한의 정통성 문제
3_등극
권력의 독점, 봉후입부
최후의 정적, 박진재│수상직에 오른 최충헌│인사권 장악│숙청, 예외 없는 쿠데타 동지│봉후입부
권력을 쫓는 부
상업활동과 축재│부의 집중│권력과 부
국왕 위의 통치자
선택되는 국왕│파면되는 희종│최충헌과 국왕
왜, 왕이 되지 못했을까?
문신세력의 대표, 국왕│최충헌의 결혼관계
거란 침입과 몽골의 팽창
거란의 침입│몽골의 팽창│몽골과의 최초 접촉│형제 약속
전란 중의 정권 수호
사병, 정권 수호│승도들의 반기│전쟁에 대한 반발│고구려부흥운동│삼국부흥운동과 토착 건국신앙│최충헌과 이성계│최충헌에 대한 평가
4_계승
최이의 권력 세습
최충헌과 최이│최이의 후계자 수업│차기 통치자│최이의 결혼관계│권력
왜 최씨 왕조인가
역사 이탈, 최충헌의 역성혁명
최충헌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여 역성혁명을 일으켰다면, 분명 역사는 이를 미화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전혀 달랐다. 국왕을 폐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왕이 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왕이 되지 않은 것일까?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으로 이어진 무인정권은 확고한 통치권을 갖지 못했다. 빈번한 권력투쟁과 잦은 정권 교체는 그러한 허약성을 드러냈고, 1인 지배의 장기집권도 할 수 없었다.
최씨 정권은 여러 면에서 이들 무인들과 달랐다. 강력한 통치권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최충헌의 직계 자손들에게 통치권을 세습했다. 국왕은 최충헌에 의해 선택되어 임명될 정도였고, 얼마든지 교체될 수 있었다. 왕위 계승은 그것대로 이루어지면서 최씨 가의 사람들에게 옥상옥의 통치권이 따로 세습되었다.
‘최씨 왕조’라는 과장된 제목을 붙인 것은 이러한 특징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 용어가 최씨 정권을 표현하는 적합한 학술 용어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최씨 정권이 발산하는 독특함을 담아내기에는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최씨 왕조에 대해 궁금한 점 세 가지
최씨 무인정권을 하나의 왕조로 설정한 저자는 최씨 왕조에 대해 궁금한 점을 밝히고 있다.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는 역사는 연구할 의미도, 재미도 없는 까닭이다. 또한 이러한 궁금증은 최씨 무인정권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첫째, 최씨 가의 사람들은 왜 스스로 왕이 되지 못했을까? 마음대로 왕을 갈아치우고 자식에게 통치권을 물려줄 정도의 힘이라면 스스로 왕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왕이 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왕이 되지 않은 것일까?
둘째, 최씨 정권은 어떻게 60여 년 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었을까? 역사의 특정한 국면에서 예외적으로 등장한 정권이, 몽골의 침략이라는 전 민족적 위기를 겪는 가운데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