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기의 ‘처변삼사’
국치시기에 태어나
떡잎부터 남다른 모습
애국 혼이 깃든 민족학교
졸업 후 취업, 김원봉 만나
일제의 만행 지켜보면서
상하이와 싱가포르·홍콩을 오가며
영남지역의 항일운동 단체
국제정세에 안목을 키우다
국내에서 3·1혁명 맞아
의열단에 가입하고
의열단 참여 조국광복에 투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에 투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의사의 신념
순국과 그 이후
유족과 추모사업
박재혁 의사 공적 내용
덧붙이는 몇 마디
? 3·1혁명 좌절 후 침체된 독립운동,
의거를 통해 희망과 용기의 불씨를 지피다
1919년에 일어난 3·1혁명은 비폭력 독립시위였다. 그럼에도 우리민족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했다. 일제는 이후 ‘문화통치’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더욱 가혹한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3·1혁명의 좌절로 한국사회는 패배의식에 뒤덮였고 어디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 시점에 감행된 청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장 처단 의거는 전국 동포들에게 다시금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고, 청년들에게는 항일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꺼져가는 독립운동에 다시 심지를 돋우고 불을 붙인 사건인 셈이었다.
박재혁 의사는 부산경찰서에서 체포돼 대구형무소로 옮긴 이후 긴 단식 끝에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우리 의열투쟁 역사에 샛별과도 같이 찬연히 빛나는 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박재혁 의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교과서는 물론 웬만한 독립운동사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기 어렵다. 박재혁 의사는 혈육 한 점 남기지 않고 조국해방을 위해 산화했기에 남은 흔적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해방 이후 70년이 훨씬 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잊힌 존재였던 박재혁 의사의 거룩한 삶과 독립에 대한 의지, 애국정신에 대해 전 독립기념관장이자 우리나라 근현대 인물에 대한 권위자인 김삼웅 선생이 직접 평전을 집필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생명을 바쳐 일제와 싸운 의열지사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몇 분 외에는 대부분이 낯설다.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표현한 대로 ‘셈해지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박재혁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셈해지지’ 않아서는 결코 안 될 분이다. 출신지인 부산에서만 겨우 인식되는 선열이 아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일관된 자주독립정신, 27세라는 젊은 나이, 적의 소굴에서 적장을 처단한 용기, 3·1혁명 좌절 후 침체된 독립운동에 불쏘시개 역할, 단식으로 생을 마감한 결기, 무후선열이라는 가족사 등 박 의사를 기려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