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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01 | 산림부, 송광사의 유래를 밝히다
산림부의 가치
산림부를 만든 사람들
02 | 천년의 가람
가람의 구성
가람의 성쇠와 자연자원
가람 축조와 목재 소요량
시대별 산림 상태
03 | 조선의 산림정책
조선의 금산제도
조선의 봉산제도
조선시대 사찰 상황
04 | 송광사
송광사 가람의 역사
송광사의 산림 규모
? 송광사 소유 산림 필지
? 송광사 산 지명
송광사 중창
? 중건중수용 목재 소요량
송광사 산림의 감당 능력
05 | 송광사 산림의 형성
송광사 산림 변천 과정
? 율목봉산(1830 경계
? 향탄봉산(1900 경계
조선 말기의 산림 소유권 분쟁
? 사찰의 산림 소유
? 송광사의 가구동 산 분쟁
? 송광사의 장막동 산 분쟁
일제강점기의 현대적 산림 소유권 형성
? 조선통감부의 지적 신고(1909
? 일제강점기의 임야조사사업(1919~1928
사찰숲의 규모 변화
? 봉산구역과 일제강점기 산림 규모 비교
? 일제강점기와 현대의 산림 면적 비교
사찰숲의 수종 구성 변화
? 지난 100년간의 임상 변화
? 지난 40년간의 수종 변화
06 | 송광사 산림 관리 역사
조선시대
? 송광사의 율목봉산 금양
? 송광사의 향탄봉산 금양
일제강점기
? 시업안 작성 배경
? 송광사 시업안
? 벌채 및 조림
광복 전후(1943~1948
? 송광사 금전출납부
? 금전출납부에 나타난 산림 수익
1960년대
? 송광사 종무일기
? 종무일기에 나타난 산림 구역
? 종무일기에 나타난 산림 관련 업무
현재
? 개괄적 현황
? 필지별 현황
07 | 맺음말
미래 천년 숲을 위한 제언
부록
참고문헌
주注
찾아보기
송광사 봉산숲·답사
오랜 사찰숲 역사를 간직한 송광사
다시 미래 천년의 사찰숲을 준비한다!
숲 전문가 전영우 교수의 <송광사 사찰숲> 출간!
우리 언어생활에 일상으로 사용하는 ‘명산대찰’은 산과 가람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를 상기시킨다. ‘이름난 산에 큰 사찰’이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큰 사찰이 이름난 산에 천년 세월동안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밝힌 사례는 없다.
농경사회에서 일반 백성과 마찬가지로 가람의 존립에는 재생가능한 자원인 산림 확보가 중요했다. 사부대중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난방 및 조리용 땔감은 물론이고, 세월이 감에 쇠락하는 가람의 수리와 보수, 중창과 중건에 필요한 목재는 모두 사찰 인근의 숲에서 조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 땅의 이름난 큰 사찰이 천년 세월 동안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도 산림자원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명산 자락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바로 산림의 재생가능성 덕분이다. 산림을 재생가능한 자원이라 일컫는 이유는 일정액의 원금(산림을 은행(산에 저축(자라게해두고 발생하는 이자(한 해의 생장량 범위 내에서 사용(벌채하여 이용하면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산림은 18세기 후반부터 점차 헐벗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산림자원의 고갈이 나라 전역으로 심화됨에 따라 국용재(위패 제작용 밤나무 조달까지 어려워지자 조선 조정은 1830년 송광사의 산림을 국가 용도림(봉산으로 지정하여 밤나무 목재의 원활한 수급을 꾀한다.
송광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사찰숲에 대한 200년 역사기록을 <산림부山林部>란 이름의 사지寺誌에 남겼다. <산림부>에는 사찰림의 기원과 형성 유래는 물론이고 송광사 사찰숲을 중심으로 조선후기의 국가 용도림 봉산의 지정과 운영 실태를 자세히 담고 있다. <산림부>에는 조선 조정에서 발급한 봉산의 벌채 허가서(관문가 현장에서 실행되는 세세한 과정과 함께 나무를 심고 보호한 전 과정도 담고 있다. 이런 까닭에 송광사 사찰숲은 봉산관리의 구체적 기록을 간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