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부 _ 정치신학을 신학적으로 최종 처리했다는 전설에 대하여
1장. 전설의 내용
2장. 한스 바리온의 정치신학 비판
3장. 최종 처리 전설의 현재적 시사성 - 한스 마이어, 에른스트 파일, 에른스트 토피취
2부 _ 전설의 문헌
1장. 문제의 발생과 시대 구획
2장. 정치-신학적 삽입구 -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3장. 정치적 측면에서 본 소재의 한계와 문제설정 - 군주제
4장. 신학적 측면에서 본 소재의 한계와 문제설정 - 일신교
5장. 정치신학의 원형 에우세비우스
6장. 에우세비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대결
3부 _ 전설의 최종 결론
1장. 최종 결론의 주장
2장. 최종 결론의 신빙성
후기 _ 이 문제가 오늘날 처한 상황에 대하여 - 근대의 정당성
옮긴이 후기
나치의 ‘황제 법학자’에게 박힌 “파르티아인의 화살”
1920년대 초, 본Bonn 대학의 동료로 만난 에릭 페테르존과 칼 슈미트는 수년간의 지적 대화를 통해 각별한 관계가 되었다.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페테르존은 슈미트로부터 영향을 받아 1930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결심하며 신학교수직을 그만두기까지 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30년대 초 히틀러의 등장으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933년 3월 31일 페테르존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향하던 슈미트는 히틀러와 손잡은 당시 정부의 부수상 프란츠 폰 파펜의 전보를 받고 베를린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치의 ‘황제 법학자’가 된 슈미트는 『국가, 운동, 국민』(1933, 「제국-국가-연방」(1933, 『법학적 사유의 세 종류』(1934, 「나치스 헌법국가의 일 년」(1934, 「나치즘과 법치국가」(1934, 「나치즘적 법사상」(1934, 「독일 법률가의 길」(1934 등 일련의 논고를 통해 나치스 어용법학자로 위용을 떨쳤다.
슈미트의 이러한 모습은 페테르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것이 페테르존이 1935년에 「정치적 문제로서의 유일신교」를 집필한 직접적인 동기였다. 이 논문에서 페테르존은 서기 4세기 초 로마제국의 사례를 통해 슈미트를 우회적으로 공격했다. 서기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격상시켰고, 그의 치하에서 카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는 “황제의 신학 가발을 다듬는 이발사”로 활약했다. 황제의 통치를 찬양하기 위해 기독교 교리를 이용한 에우세비우스를 향한 비판을 통해 페테르존이 히틀러와 나치즘에 동조한 슈미트를 겨냥하였음은, 논문의 마지막 각주에서 칼 슈미트와 그의 저서 『정치신학』을 언급하며 정치신학이 신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분명했다.
슈미트는 35년이 지난 1970년이 되어서야 페테르존의 논문에 답했다. 한스 바리온을 인용하며 “파르티아인의 화살”이라고 부른 페테르존의 공격을 상처에서 뽑아내겠다고 결심한 슈미트는 『정치신학 2』에서 그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