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나점수가 보여주는 ‘역설의 아름다움’은 관객들을 늘 설레게 한다. 그의 작품 앞에 서 있을 때 얻는 기쁨은 말로 쉽게 설명되지 않기에 더욱더 그러하다. 형상을 지우기 위해 형상을 구축하고, 공간을 점거하지 않기 위해 공간을 압도하고, 말하지 않기 위해 시詩를 드러내며, 조각의 기념비성을 정복하기 위해 쓰러진 나무를 당당히 세우는 그의 작업을 혀와 뇌의 역량을 빌려 온전히 설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역설 중에 이런 역설이 없고, 아름다움 중에 또 이런 아름다움이 없다.
그의 조각 행위는 이러한 역설의 실천이다. 의식意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동보다는 무한히 반복되는 무상적無償的 노동으로 질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나무를 사랑하기 위해 푸르름을 다한 나무의 처연한 죽음을 작업실로 데려온다. 그리고 작가는 나무에 아프지 않은 상처를 내고, 힘들지 않은 ‘서 있음’과 ‘기욺’을 제안한다. 여기에 종종 용접된 쇠붙이를 쓰긴 하는데, 그것은 그저 나무의 어떤 ‘상태’를 돕기 위해 결부된 것일 뿐이다. 그 상태는 다름 아닌 ‘자연의 심리적 균형’이다. 일전에 김영기 선생이 말했듯, 이 근원적인 ‘한결’의 정중동靜中動(고요한 가운데 움직이는 모습은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됨으로써 선禪의 화畵를 이루는 것’이다. 자연과의 일체감에서 오는 화畵는 결국 불균형의 사라짐으로 인한 화和로 귀결된다.
이재걸 /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