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태백, 문경, 포항 시절: 1963~1984
1. 태백의 검은 시냇물
2. 수돗물로 허기를 달래던 어린 시절
3. 성적을 올린 비결
4. 걸인에게 밥상을 내어주신 어머니
5. 포철공고 수석 입학의 기쁜 소식
6. 포항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
7. 1981년 서울의 4월, 생애 첫 수업
8. 광부 아버지와의 추억
2부
온산과 안강 시절, 풍산금속공업주식회사: 1985~2000
1. 첫 직장, 풍산금속공업주식회사
2. 1987년 6월 울산 민주화 투쟁, 다시 거리로 나서다
3. 부풀었던 노동해방의 꿈, 풍산 온산공장 민주노조 설립 시도
4. 부당전보를 받고 풍산 안강공장에서 ‘8인회’
5. 들판의 불씨, 다시 태안반도로
6. ‘풍산금속은 치외법권 지대인가?’ 1988년 8월 8일 4명 해고
7. ‘우리는 왜 해고되었는가’ 최초 유인물 배포하던 날의 기억
8. “여러분이 내게 가라고 하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떠나지 않겠습니다”
9. 해고자 복직투쟁과 전원 복직
10. 수배와 구속 그리고 오갈 데 없는 신세
11. 사법시험 도전과 합격
3부
서울 시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2002~2017
1. 변호사란 무엇일까?: 민주노총 법률원 초대 원장
2. 해우법률사무소와 사용자 대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
3. 국민이 부르면 어디든 간다: 최장기 민변 노동위원장
4.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 진상조사단 조사팀장과 구속 철거민 공동변호인
5. 변호사에서 피고인으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지원
6. 공정사회파괴?노동인권유린 삼성바로잡기운동본부 공동대표
7. 민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 위원장
8. 헌법재판소 법정에서 소리치다
9. “너의 잘못이 아니야”: 2016년 구의역 사망재해 시민대책위원회 진상조사단 단장
10. 촛불이 횃불 되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법률팀장
11. 이재용에 대한 영장 기각 직후 법률가들의 긴급 노숙 농성 투쟁
1
◎ 정의가 무너진 현장, 바로 그 자리에서 맞서는 사람 1
권영국은 현장에서 바로 맞섰다. 뒤돌아서 나오며 맞서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다. 현장에서 즉각 불의에 대응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불의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집회를 꾸리고 시위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사람이자, 시위 대열 선두에 서는 사람이다. 인권을 침해하는 무장 경찰 병력에 맞서 물러서지 않다 보니 공무집행방해죄로 여러 차례 기소됐다. 아마도 지난 보수 정권 시절 한국에서 제일 많이 기소된 ‘변호사’일 것이다. 변호사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사례다. 시위 현장에서 뒤돌아보면 노동계의 조직 대오조차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런 일이 부지기수였다. 시국 사건, 인권 사건과 관련해 그보다 자주 ‘조사단’ ‘진상조사단’에 이름을 올린 이는 없다.
현장에서 바로 움직이는 그런 ‘단순 명료한 즉각성’은 어디서 왔을까. 정의가 무너진 곳의 위태로운 현실을 절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인권을 보장하고 정의를 세우려면 인권과 정의가 무너지는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권력의 침탈이 있는 곳, 자본의 노조 파괴가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 맞서야 한다.”
한 가지 뚜렷한 예를 들어보자. 법원이 변호인의 ‘현장 접견교통권’을 명시적으로 확인해준 최초의 사건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은 사건이 끝난 뒤 변호사가 경찰이나 검찰을 찾아가 억류돼 있는 시민을 만나보기 위해 접견을 요청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변호사 권영국에겐 ‘보통의 접견’이 아니라 ‘현장 접견’이 문제가 됐다. 사건이 벌어진 그 시각, 그 장소에서 변호사가 곧바로 자신의 고유 권한인 접견교통권을 주장한다. 부당한 공권력에 대응하는 속도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거리의 변호사’라는 별칭은 빈말이 아니다. 그가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두고 ‘당랑거철’이라고 언론이 평한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2009년 6월 26일 오전 10시 30분경 그는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옥쇄파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