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의 시대 들끓는 모순을 폭로하다
후퇴하는 민주주의, 해체되는 복지국가
‘오늘날 미국에는 하나의 정당밖에 없다. 그것은 기업당이다. 그 당의 한 정파가 민주당이라 불리는 온건 공화당이다. 현재의 공화당은 실은 정상적인 의회주의 정당 흉내도 못 내는 일개 정치조직일 뿐이다.’(21~22면 촘스키의 이 신랄한 논평을 현실로서 입증한 것이 오바마에 이은 트럼프의 집권이다. “옴짝달싹 못하고 자본과 권력에 복무”하는 ‘정치조직’ 공화당이 대중의 표를 얻기 위해 동원한 것은 가장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일 것 같은 이들, 기독교 복음주의자와 순혈주의자 들이었다.(22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면서 대중을 위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폭스TV 같은 거대 미디어기업의 선전활동과 텔레비전 광고가 이들 대중을 기만하는 데 앞장섰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방치되어온 백인 남성 노동자계급의 분노는 트럼프의 당선으로 귀결되었다. 실제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소득수준 상위 0.1%의 사람들은 이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한다. 이 집중된 사적 자본의 심사를 거치지 않으면 정계에 들어갈 수조차 없고, 수억 달러 기금을 모으지 못하면 퇴출된다. 촘스키는 이런 구조를 사실상의 ‘금권정치’라고 부르며 민주주의의 ‘결핍’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라다고 강조한다.(28면 이들 기득권층은 일상적인 통화감찰과 정보수집으로 감시를 체계화하고, 테러 위협을 과장해 대중이 국가의 통제를 수용하게 만들며, 에너지회사의 이권을 위해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학자금 지원과 의료보장을 폐지하고 식량배급표와 실업수당을 삭감한다.
촘스키가 보기에 이런 민주주의의 후퇴 뒤에는 신자유주의의 득세가 있다. 전후 유럽이 이룩한 최대 성과인 복지국가는 사민주의·중도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서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단 복지혜택의 축소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가능케 한 사회적 합의, 민주주의의 쇠퇴를 가져왔다. 자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