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서장| 5·18진상규명투쟁의 역사
1_유신의 그림자
박정희 정권의 유산
군의 정치 동원에 물꼬를 트다
새로운 정치군인들, 신군부
정치군인들, 학원소요를 ‘고대’하다
육군본부의 시위 진압지침
2_5·17쿠데타-비상계엄 전국 확대
신군부, 학생 시위에 군 투입을 벼르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시위대책
대국민사기극, ‘북풍北風’
‘서울의 봄’을 앗아간 5·17쿠데타
3_항쟁의 시작
군대, 대학을 점거하다
군, 정치 개입에서 권력 장악으로
비상계엄의 실체
4_폭력과 야만의 시간
가자, 도청 앞으로!
5월 18일, 그날의 시작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
군의 최초 발포는 언제인가?
도시게릴라식 난동을 진압하라!
공수부대의 소요 진압을 넘어선 ‘폭동 진압’
왜, 광주였는가
5_항쟁과 발포 사이
차량 시위와 집단발포의 시작
두 구의 시신, 항쟁의 전환
누가 실탄을 지급했고, 발포를 명령했나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희생자 규모
시민들, 언제 총을 들었는가
군의 작전 변경, 광주 외곽을 봉쇄하라
민간인 학살과 오인 사격의 조작
광주의 소식을 전하다
두 개의 지휘권
6_일어서는 광주
시민들, 공동체를 지켜내다
시민군의 수습안 대 무장해제
항쟁파가 주도권을 쥐다
‘폭도’와 양민 분리와 배제의 의미
군, 상무충정작전을 준비하다
상무충정작전 실행 전야
아! 5월 27일 새벽
시민을 상대로 한 전투의 후과
5·18항쟁이 남긴 과제
주석
찾아보기
신군부는 정치 개입을 ‘예비’했다
지은이는 5·18의 역사적 맥락을 인과관계에 따라 추적하고 있다. 우선 군의 정치적 동원(계엄령과 위수령, 긴급조치 등,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 투입, 정치하는 군인들(신군부 등이 박정희 정권이 남긴 유산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1979년 10·26 이후, 12·12군사반란을 통해 군 지휘권을 장악한 이후 신군부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검토하고 있다. 이어 보안사령부의 부마항쟁 평가와 육군본부의 보고서에 1980년 공수부대의 폭력이 배태되었으며, 이 같은 군의 강경 진압을 부추기는 지침이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공수부대에 의해 더욱 잔혹하게 적용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신군부는 시위 진압용 ‘충정훈련’을 강화했으며, 5월 15일 대학생 시위대의 ‘서울역 회군’ 등 군 투입의 명분이 희석되는 와중에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정치 군인들의 ‘야욕’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무리수의 시작, 공수부대 투입
5월 18일 오후 4시경부터 광주 시내에 공격형 특수부대인 공수부대의 투입이 결정되었다. 충분한 경찰 병력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지은이는 공수부대의 시위진압 양상이 어떠했는지를 군과 민간의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1980년 2월경부터 진행된 충정훈련(폭동진압훈련과 공수부대원들의 인식, 상부의 명령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끼친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공수부대원들의 폭력적이며 야만적인 행위를 초래했다. 진압과정에서 나타난 공수부대원들의 폭력과 야만, 김대중 연행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중첩되어 5월 19일부터 학생 시위가 시민항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5월 19일 군의 최초 발포가 있었으나 정식 명령계통(공수부대-31사단-전교사-2군사령부-계엄사령부에 따른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보고된 부대(공수부대-보안사령부와 계엄사령부에서도 적절한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후 발생한 군의 발포에서 공통된 현상이다.
북괴군 침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