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정세현
프롤로그 평양의 추억 유년 시절
1장 고교 시절 최초의 저항과 그 후유증
2장 학자의 길과 관료의 길 사이 좌절된 교수의 꿈
3장 통일부 공무원 시절 1 대북정책의 일선에서
4장 통일부 공무원 시절 2 아웅산 테러 사건과 남북관계
5장 일해연구소와 통일연구원 시절
6장 통일비서관 시절 1 김일성 주석과의 불발된 만남
7장 통일비서관 시절 2 대북 쌀 지원과 퍼주기 논란
8장 통일부 차관 시절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9장 통일부 장관 시절 1 부시의 ‘악의 축’ 발언
10장 통일부 장관 시절 2 북핵 문제와 6자회담
11장 천안함 사건과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 이명박 정부
12장 ‘통일은 대박’의 시대 박근혜 정부
13장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남북관계의 급진전
14장 평화와 통일의 길
나가는 말 ? 박인규
한 시골 청년이 깨우친 비주류로서의 삶
: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어느 마이너리티 리포트
정세현은 8·15 해방을 불과 두달 앞둔 1945년 6월, 당시 생계유지를 위해 북만주에 이주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후 가족을 따라 고향 전북 장수로 돌아왔고, 어린 시절 학업 성적이 뛰어났던 덕분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의 삶은 묘하게 ‘비주류’로 흘러왔는데, 중학교 시절엔 산골 오지 출신이라고, 고등학교 때엔 ‘경기중’ 출신이 아니어서 또래집단에서 배제되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신정권하에서 당시 학교장이 비상식적인 과정을 거쳐 발령받자 그는 반대 시위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내부 밀고로 발각되어 무기정학에 처해진다. 이 사건은 정세현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 저는 동급생들이지만 머리 좋다고 하는 사람들,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회주의적인 태도에 굉장히 실망했어요. 그때 받았던 충격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 반대편에 서는 것이 정의다’라는 생각을 계속 품고 살았어요.”(44면
재수 시절에는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드냐’라는 플래카드로 회자되는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주도했고, 사수 끝에 입학한 대학에서는 신입생 사전교육 때 어느 교수의 말을 듣고 자신의 미래를 어렴풋이 정하게 된다. “여기는 외교관시험 공부를 시켜주는 곳이 아니다. (… 분단국에서 국제정치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이유는 하나다. 통일 문제 때문이다. (…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며 항상 통일 문제와 연계하여 생각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65~66면
국제정치학으로 진로를 확정한 뒤 그는 은사들의 대외활동을 통해 남북문제를 현장감 있게 접하게 된다. 일례로, 당시 서울대 외교학과 박준규 교수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적십자회담(1971년에 남측 인사로 참석했고 그로부터 북한의 실상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석사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이용희 교수가 통일원 장관으로서 부임하면서 정세현 또한 1977년 통일원 보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