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산사건의 가해자인 황실을 천주교 신자로 받아들인 가회동성당 이야기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가회동성당 인근에서 주문모 신부는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밀고자가 생겨 미사 중에 포졸이 들이닥치자 주문모 신부는 황급히 대피하고, 최인길 마티아가 영대를 메고 주문모 신부의 행세를 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를 대신해 잡혀가서 곤장 50대를 맞아 즉사했다. 최인길 마티아가 순교한 이후 주문모 신부는 가회동성당 관활 내에 있는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피신했는데, 주문모 신부를 못 잡게 되자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한양으로 발길을 돌려 자수했다. 자신이 잡히지 않으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초를 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자수한 주문모 신부는 군문효수(화살로 두 귀를 밑에서 위를 향하게 뚫고, 목을 잘라서 그 목을 창에 끼워 높게 매다는 형벌로 순교했다. 또 강완숙 골롬바도 결국 잡혀서 참수를 당했다.
이와 같이 첫 미사 후에 일어났던 최인길, 주문모, 강완숙 등 순교자들이 치명당한 사건을 ‘북산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이 북산사건 이후 조선 땅에서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다. 따라서 북산사건의 중심에 위치한 가회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뿌리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박해의 주체가 박해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일이 북산사건이 발생한 가회동성당 관할 내에서 일어났다. 북산사건 당시 박해의 주체는 황실이었는데, 황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친왕과 의친왕비가 가회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의친왕 ‘이강’이 ‘비오’, 의친왕비 ‘김숙’이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받았는데, 조선의 마지막 황실이 가회동성당에서 세례받은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일들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 가회동성당을 새로 건축하는 과정에서 만난 신비로운 하느님 이야기
가회동성당을 건축할 당시에 교적신자 수는 당시 약 1,600명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