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은 왜 이토록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는 것일까?
편견은 흑백논리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십여 년 전에 강원용 목사가 한 말, “정치를 비롯해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꼬인 현실의 원인을 흑백논리에서 찾아야 하며, 이 흑백논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대화뿐이다.” 이 말은 언뜻 진부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늘 이 시점에서 곱씹어보아도 정확한 현실진단이요, 올바른 처방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정치인 내지 종교인이 대화에 나설 때 꼬인 현실, 즉 사회적 갈등은 풀리고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토록 명쾌한 진단과 처방이 어제오늘 있어온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수 없이 반복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전히 대화는 실종되고 흑백논리만 횡행한다는 데 있다. 흑백논리, 즉 편견은 왜 이토록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는 것일까? 이 악연은 과연 떨쳐버릴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저주인가? 하지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저주란 없다. 어떤 저주이든 그것을 푸는 열쇠는 있게 마련이다.
가다머는 그의 주저 「진리와 방법」에서 “이해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리는 절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리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사 내지 사상사 또는 과학사에서 수 없이 증명되었듯이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통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동설을 주장한 브루노와 갈릴레이도 당대에는 천기를 누설한 죄인으로 낙인찍히지 않았던가. 관념론을 집대성한 헤겔과 헤겔의 관념론에 반기를 들고 유물론을 체계화한 마르크스, 서양철학의 이 두 거두가 공히 진리의 불변성을 부정하고 역사발전을 정반합의 원리, 즉 변증법에 근거하여 논증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림자 없는 빛은 우리의 눈을 찌를 뿐 아름답지 않다. 빛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빛이게 해주는 그림자에 빚을 지고 있다. 그러니까 빛과 어둠은 상호 길항관계 이면서도 공존관계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