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문 홍범도 장군 진혼사
1부
청산리의 영웅, 홍범도
1장 출생에서 성장까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다 │ 조실부모, 젖동냥으로 자라 머슴이 되다 │ 군대 지원하여 3
년 동안 나팔수 생활 │ 부패 상관 폭행하고 군문을 뛰쳐나오다 │ 제지공장 3년, 주인의
폭압에 다시 탈출
2장 파란곡절의 젊은 시절, 의병투쟁 시작
금강산 신계사에서 비승비속의 생활│비구니와 함께 신계사를 떠나다│동지 만나 일본
군 소부대 섬멸│산포수와 농민으로 의병대 조직│단양 이씨와 해후, 아들과의 상봉
3장 산포수 의병장, 관북 지역 일본군 소탕전
산포수 의병부대 대장으로 뽑히다│일본군과 일진회원 가차 없이 처단│ 일제, 가족 인질
삼아 회유작전 벌이다│부인은 옥사, 아들 양순은 전사│초기 산포수 의병의 혁혁한 전과
4장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오가며 펼친 항일전
한민족의 고토, 간도로 이동│의병가.독립군가로 사기를 북돋우다│연해주로 이동, 안중
근을 만나다│‘13도의군’과 ‘성명회’에 참여하다 | 권업회 회장단에 선출돼 항일 지도│
봉밀산에서 둔전병으로 장기전 대비
5장 대한독립군 창설, 국내진공작전
러시아혁명기 노령 왕래하며 무기 구입│대한국민의회 참여, 군무부 활동│대한독립군
창건, 본격 항일전│항일 연합군 이끌고 국내진공작전 벌이다
6장 봉오동전투의 영웅
3.1운동 계기로 독립군 부대 연합전선│봉오동으로 일본군 유인 섬멸│적군 500여 명
살상한 대첩│독립군의 영웅으로 부상하다
7장 청산리대첩을 승전으로 이끌다
일제의 보복, 마적단까지 동원│어랑촌에 진지 구축, 연합부대 사령관에 추대│매복 전술
로 일본군을 자멸로 몰아넣다│국치 이래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박은식의 청산리대
첩 기록│일제 정보기관의 ‘홍범도 평가’│이범석의 청산리대첩 주역 왜곡│“청산리전쟁
주역은 홍범도”
2부
시련 속의 민족혼, 홍범도
8장 일제의 보복 경신참변, 독립군 기반 상실
학살·약탈·소각의 ‘삼광전략’│매장한
‘하늘을 나는 홍범도’, 독립전쟁의 전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7일 만에 어머니를 잃고 젖동냥으로 어렵사리 자라다 9세에 아버지까지 여읜 소년 홍범도. 그는 머슴으로 살다 15세에 나팔수로 병영 생활을 시작한다. 1895년 본격 의병투쟁에 투신한 홍범도는 간도와 연해주에서 크고 작은 항일 전투를 무수히 치르는 동안 아내와 아들을 잃는다. 그러나 역경에 굴하지 않고 그는 대한독립군 창설과 국내진공작전 및 봉오동˙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독립 영웅으로 우뚝 선다.
일제가 가장 겁냈던 의병장, 부하들과 주민들이 존경하고 따르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정통 무관 출신은 아니지만 남다른 지략과 전술로 일제와 싸웠던 홍범도 장군은 광복 74주년이 되는 지금까지 ‘유해 귀환’ 논의조차 없는 ‘망각의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을 앞두고 홍 장군의 유해를 언제까지 이역만리에 방치할 것인가? 평전의 대가 김삼웅 저자는 이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라고 전한다.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 홍범도의 뜨거운 삶을 돌아보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 게릴라전 즉 ‘빨치산’ 투쟁으로 일제와 싸웠다. 홍범도 역시 항일 빨치산 전투의 주역이었다. 홍범도는 자신의 권위나 이익을 내세우지 않는 남다른 인격, 열세를 극복하는 탁월한 지휘 능력과 기발한 전술 작전으로 항일투쟁의 전설이 되었다. 상해 임정 건립 시 교통총장에 임명되었던 문창범(1870~1938년의 증언에 의하면 홍범도는 수수한 조선인 노인의 옷차림을 한 산포수다운 비범한 장수였고, 투박한 말투 반면에 인자한 태도가 마치 시골 할아버지 같았다고 한다.
간도와 극동 러시아의 춥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빨치산 대장으로서 일본군을 토벌하고,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국치 이래 첫 국내진입작전으로 일제를 공포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청산리대첩 이후 일본군의 보복인 ‘삼광전략’으로 연해주로 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