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부: 가서 원수를 사랑하라
장면1. 주님이 아나니아를 찾아오시다
장면2. 불편한 만남
장면3. 남 좋은 일만 꼬치꼬치 당부하시다
장면4. 주님 하시던 일 떠맡기
장면5. 달갑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장면6. 예약된 순종
2부: 넘치도록 순종하다
장면7. 그 집에 들어가다
장면8. 원수의 이름, “형제여”
장면9.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장면10. 주님의 심판, 아나니아의 용서
장면11. 바울을 새사람으로
장면12. 평신도가 사도에게 세례를 주다
장면13. 든든한 후원자 아나니아
장면14. 다메섹 식구들
나가는 말
편집자가 뽑은 문장
주님 명령은 아나니아에게 물리적인 보상은 물론이고 정서적인 보상조차 주지 않았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만족감이나, 핍박받던 다메섹 교회가 하나님께 가장 좋은 선물을 받았다는 위로감도 가질 수 없었다. … 주님 명령은 아나니아의 마음과 감정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만을 만족시키는 명령이었다.
43-44쪽__장면3 〈남 좋은 일만 꼬치꼬치 당부하시다〉 중에서
어쩌면 아나니아는 주님을 만나고 명령을 들으면서, 마치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밥을 먹다가 바울처럼 ‘숟가락을 손에서 놓쳐 떨어뜨리면서’ 식욕마저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여러분이 아나니아라면 주님을 만난 것이 기쁘겠는가? 주님을 만났다고 환호성을 지르겠는가?
55쪽__장면5 〈달갑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중에서
그 사도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가버렸고 이제 주님께 남아 있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뿐이다. … 만약 우리가 지금을 살아가는 ‘아나니아’가 되지 않으면, ‘바울’은 여전히 유다의 집 구석방에 쑤셔 박힌 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 모습으로 탄식하기만 하고 있을 수도 있다.
68-69쪽__장면6 〈예약된 순종〉 중에서
아나니아는 사도 바울을 향해 마땅히 ‘이 원수 같은 놈아’라고 불렀어야 마땅하다. … 그러나 아나니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어쩌면 ‘형제여’라는 말은, 아나니아의 입에서 나온 표현이 아니라,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지고 찢어질 대로 찢어진 그의 가슴 속에서 흐느끼듯 새어 나온 신음소리였을지 모른다.
84쪽__장면8 〈원수의 이름 “형제여”〉 중에서
이 일은 억울하게 피해자로 살아왔던 교회와 아나니아와 성도들이, 핍박자였던 바울을 용서하고 그에게 새 삶의 기회를 열어 주는 사건이다. 주님은 심판하시고, 용서와 치유는 피해자였던 아나니아의 손에 맡기시는 사건이다. ‘나는 네가 용서하기를 원한다. 나는 내가 바울에게 짊어지게 한 형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