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서울시립합창단에 있던 우주호는 주변의 권유로 1992년 2월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라 발터 카탈디 타소니, 파올로 실베리, 카를로 베르곤치 등 당대 대가의 지도를 받으며 유럽 무대의 샛별이 되었다. 프란체스코 칠레아 국제콩쿠르 등에서 1위를 차지했고, 로마 국제오페라콩쿠르 1위를 계기로 로마국립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역, ‘팔리아치’의 토니오 역으로 데뷔하며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주목을 받았다. 독일 플랜츠부르크극장에서 ‘오셀로’의 이아고 역으로 출연한 후 독일의 저명 음악잡지인 《오픈벨트》가 “베르디가 원하는 최고의 바리톤이 나타났다”고 호평할 정도였다.
가난한 유학생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음악 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울 무렵,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어머니마저 치매 판정을 받은 것. 우주호는 유럽의 은사, 지인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 생활을 접게 된다. 어머니 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우주호는 중학생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점심시간에 수돗물로 헛배를 채울 정도로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어린 주호는 운명처럼 다가온 성악 공부를 계속 밀고 나갔고, 어머니는 방앗간을 하며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어머니의 희생 없이 아들의 음악은 있을 수 없었고, 아들은 어머니의 황혼을 지키며 새로운 음악 인생을 펼치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에 정착한 우주호는 고향인 포항의 선린애육원을 찾아가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나의 목소리는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것이 아니기도 하니 이제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여야 하는 것일까. 눈물 젖은 기도를 들어주던 신에게 보답하는 길은 무엇일까.” 우여곡절 끝에 얻은 물음에 대한 응답을 실천으로 옮겼던 것이다.
곧이어 ‘우주호와 음악친구들’을 결성해 농어촌과 장애인시설, 노인복지관, 보육원, 교정시설 등에서 17년간 1500여 회의 무료 음악회를 열었다. 이 ‘문화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홍사종 전 경기도문화예술회관 관장, 김병종 서울대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