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법학에서 형성법학으로
기존 법학에 반기를 들고 시작된 비판법학운동이지만, 웅거는 비판법학이 드러내는 또 다른 편향도 좌시하지 않았다. 그가 왜 ‘비판법학의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판법학에 대한 웅거의 비판은 이 책의 1, 2장에서 상세하게 개진된다. 학자들은 웅거의 법철학을 ‘비판법학’이 아니라 ‘형성법학’이라고 불렀다. 그가 주류 방법론을 간단히 배척하지도 않고, 여타 비판법학의 방법적 편향을 묵과하지도 않으면서 이를 하나의 방향에서 건설적으로 엮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법학 방법론의 일반이론을 제시하려는 것이 그의 법철학적 야심이자, 이 저작의 근본적 의도로 여겨진다.
세상에 거하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에나 비판법학운동은 존재한다. 미국, 독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노동계급의 이익 옹호를 강조하는 흐름이 지배적인 나라도 있고, 미국처럼 다양한 지적 기반에 입각한 제도개혁론이 우세한 나라도 있다. 그러나 웅거는 혁명, 건곤일척의 체제 전복을 거부한다. 이 책에서도 밝히듯, 제도적 프로그램에 입각한 사회의 점진적 변혁을 구상하기 때문이다. 웅거는 자신의 입장을 보수적인 개량과 혁명 사이의 “혁명적 개혁”(초자유주의이라고 부른다. 기성 제도에 투항하지 않으면서 참여를 추구하고, 구조 안에서의 일상적인 운동과 구조에 대한 비상적인 운동 간의 격차를 줄이면서 점진적 변혁을 지향한다. 웅거는 이러한 정신을 “세상에 거하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성경 구절로 요약한다. 초자유주의는 기성 질서 안에서 자유와 평등에 안주하지도 않고, 기성 체제의 전복을 통해 평등을 일거에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인간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로 계발하고 발휘하게 하여 현재의 질서를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영구혁신의 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