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며
목사가 된 사연/ 아버지의 비뚤어진 치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신/ 체온 없는 신학이 무슨 소용인가?/
스승들과의 만남/ 카메라를 처음 손에 쥐다/
드럽게 힘드네/ 급정차 순간에 그가 보인 첫 반응/
가장 짧았던 설교/ 깜짝 놀랐던 가정 심방/
교통사고 후유증/ 주일성수의 포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여준 행동/ 철원에서 온 집사님/
제게 맡겨주십시오/ 교회로 숨어든 병사/
전세금에 대한 뼈아픈 추억/ 공부 안 하면 저런 데서 산다/
용기/ 용서를 구하다/
라이카 카메라/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주중에는 교회 오지 마시오/ 힘들 텐데, 그래도 하겠니?/
아, 행복하다/ 말씀의 주인과 함께 계시다/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비염에서 해방되다/
광야에서 꽃 한 송이를 심는 사람들/ 저희 부부가 제일 놀랐어요/
핸드드립 수업/ 이런 커피는 드릴 수 없습니다/
친구란?/ 목회 성공/
노점상의 배려/ 목사의 소명이 없는 듯합니다/
당신 좌파였어?/ 그 기도 제가 이루어드리지요/
아버지의 마음/ 어떤 후원자/
덕분에 나도 숟가락을 하나 얹다/ 칼자국/
반려묘를 위한 기도/ 체급이 다른 사람과는 다투지 않는 법이란다/
아이의 리듬에 맞추는 법을 연습하다/ 중환자실 앞에서/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카페 매니저님이 세례를 받다/
어느 결혼식
글을 마무리하며
본문 중에서
그날 나는 세상에서 엿새를 살아가는 교인들의 삶에 대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목사인 나는 일주일 내내 예배당 안에서 맵시 나는 옷을 입고 교양 있는 언어를 구사하며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의 향기’ 운운하지만 정작 교인들은 때 묻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서 땀범벅이 되어, 그리고 시시때때로 “드럽게 힘드네, 씨X” 같은 신음을 뱉어가며 겨우겨우 사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처절한 삶의 현장을 모른 채 온갖 화려한 말발로 치장한 나의 종교 언어들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날 나는, 비록 일주일 내내 땀에 찌든 옷을 걸친 채 입에는 욕지거리를 달고 이 길 저 길 누비면서도 주일이면 가장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예배당을 찾는 그 아주머니가 누구보다 귀하게 느껴졌다.
_44-45쪽에서
고민 끝에 나는 30년 가까이 지켜온 주일성수 개념을 내려놓기로 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란 뜻에서 말이다. 그리고 매주 주일이면 예배 후 남성 교우들과 함께 부대 근방의 맛집을 다니면서 친교에 힘썼다. 그 결과 많은 남성 간부 신자들이 교회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요즘은 이따금 어린 시절에 철저하게 지켰던 주일성수 모습이 아련하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가기에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문화가 너무 많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다만 자신의 쾌락과 복지를 위해서는 주일에 되도록 돈을 안 쓰고, 다른 사람의 기쁨과 유익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쓸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_66쪽에서
“목사님, 제가 요새 새벽기도회에 나와 울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제 몸이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목사님도 잘 알다시피 제가 젊은 날 월남에 가서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에 대해 평생토록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다니며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 내가 젊은 날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