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1장__내게는 조선 영화가 전부다
나의 러시아 방랑기
〈철인도〉 평을 읽고
현실을 망각한 영화 평자들에게 답함
신변산화
〈아리랑〉과 사회와 나
2장__이 땅에서 내가 할 일은 영화뿐이다
‘개화당’의 영화화
〈개화당〉의 제작자로서
부활한 신일선을 보고, 극계와 영화계의 이 일 저 일까지
감독으로서 만들고 싶은 영화
조선 영화인의 투지와 경제
채플린과 그 예술을 보고자
3장__다시 태어나도 영화를 하련다
당대 인기 스타, 나운규 씨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명배우, 명감독이 모여 ‘조선 영화’를 말함
조선 영화감독 고심담
명배우 나운규 씨, 〈아리랑〉 등 자작 전부를 말함
영화 시감
(부록 소설로 보는 〈아리랑〉
전설이 된 한국 영화의 혼불
나운규와 〈아리랑〉
1926년 단성사에서 개봉한 〈아리랑〉은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사실주의에 입각한 영화로, 조선 영화 최초의 대형 흥행작이자 문제작이었다. 특히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8·15해방 이전에 만들어진 한국 영화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항일 민족운동의 새로운 양식을 알려주었으며, 우리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을 영화화해 민족의 혼을 되살려 놓았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주연까지 1인3역을 맡은 나운규는 조선 영화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급부상했으며, 이후 한국 영화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나운규의 업적과 영화에 대한 열정을 기리기 위해 1990년 춘사영화예술상이 제정되었고, 문화부에서는 1991년 ‘연극영화의 해’를 기념해 그를 ‘1월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리고 1993년 정부는 영화로 민족정신을 드높이고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아낸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1937년 8월 9일, 나운규는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과로 등이 겹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최초의 영화인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영화인들의 추모 속에 〈아리랑〉의 개봉관인 단성사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조선 영화에서 한국 영화로
나운규를 넘어 새로운 나운규로
1902년 10월 27일에 태어난 나운규는 3·1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독립군 비밀 단체에 가담해 2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이때 춘사라는 호는 감옥에서 얻었다. 1924년 영화계에 진출해 15년 동안 남긴 작품은 29편에 이르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중 직접 각본과 감독, 주연을 맡은 영화는 15편이나 된다. 특히 1926년에 개봉한 〈아리랑〉과 이 작품을 만든 나운규는 조선 영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흥행 여부에 따라 기대와 실망이 달라지곤 했지만, 나운규는 조선 영화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숱한 검열에 부딪히면서도 자신만의 예술관을 표현하려 애썼고, 상업성의 굴레 속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