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천년 혹은 수 백년 전에 기록되었던 문자들을 종이에 새기고 그것을 오려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해 간다. 그가 선택한 문자들은 한 획, 한 획 긴 시간동안 사력을 다해 새기고 오려냄으로써 단순히 글자에 그치지 않고 그의 정신구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사유를 담으려 한다. 그가 알고 있는, 또는 그가 이해하고 있는 그 글자에 담긴 뜻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해 택하고 있는 이러한 수행과도 같은 방식은, 그가 대면하고 있는 자기존재에 대한 극복의지이자 보존의지의 양면성에서 발화하고 있다. 신의 존재와 맞닥뜨렸던 유년시절의 경험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선택했던 종교관에서 예술론적 조형이념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가 문자를 조형요소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문자는 형상이나 소리, 그 밖의 전달매체보다 직접적이고 더 구체적인 소통의 형식으로 사유체제를 물성화하는 시각매체란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인간의 사유는 발화된 순간 사라지지만, 문자는 인간의 사유 심층에 남아 있는 의식 하나까지도 모두 언표화言表化하여 자기표현 욕구와 타자를 지향하는 사회적 기능을 담당한다. 문자는 역사시대로 돌입을 이끌었고 문자의 기록성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해 주고 있다. 문자는 단지 언어 표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지향한다. 의미의 저장고이자, 해석을 요구하는 실체요, 의사소통의 매개고리인 것이다. ● 송미경 /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멀리서 보면 표면을 단조롭게 도포한 단색 추상화 같은 오윤석의 작품은 극과 극이 만나는 카오스모스의 장이다. 그는 전형적인 그림 크기의 공간에서 시간을 가속시킨다. 빠른 속도가 오히려 정지감을 낳듯이, 그의 작품에는 ‘극의 관성’(폴 비릴리오이 있다. 시간의 가속화에 의해 공간이 축소되어 이것과 저것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는 이 세계는 비활성의 무질서에 머물지 않는다. 여러 차원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차원들이 융합되면서 생겨나는 것을 중시한다. 전시장 조명과 어우러져 고상하고 은은한 화면을 보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