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에 부쳐
프롤로그
1장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 1945년
-. 출생
-. 오사카에서 보낸 청소년기
-. 조선펌프제작소 입사
-. 대한노총의 결성과 참여
-. 1946년 대한노총 결성 배경
-. 9월 총파업과 전평 파괴공작
-. 전진한
-. 대구로 내려가다
-. 한국전쟁
2장 이승만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다
-. 조방파업대책위원회
-. 노동관계법 제정
-. 결 혼
-. ‘이승만 유시’ 위반으로 제명
-. 대구 내외방직쟁 대책위원회 활동
-. 대한방직노조 쟁의
-. 대한노총과의 결별
-.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
3장 4월 혁명과 5·16 쿠데타
-. 4월 혁명 직전
-. 4월 혁명 직후
-. 7·29 선거
-. 교원노조 결성 투쟁
-. 제일모직 노동쟁의
-. 이일재
-. 2대 악법 반대투쟁
-. 한국노련과 한국노협
-. 5·16 쿠데타
-. 쿠데타세력에 의해 구속된 김말룡
-. 한국노총 결성 무효소송
-. 한국노련의 부활
-. 노동법 개악
4장 한국노총 민주화를 위한 기나긴 여정
-. 1960년대의 노동계
-. 박정희의 회유
-. 전국연합노조 위원장
-. 사카린 밀수 사건
-. 희 망
-. 대한조선공사의 파업투쟁
-. 가톨릭노동청년회(JOC
-. 전태일의 분신
-. 세 차례 노총위원장 선거
-. 유신체제와 한국노총의 어용화
프롤로그
김말룡의 ‘노동천시에 대한 저항’은 대한노총 가입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직장이던 영등포 소재 조선펌프제작소의 임금인상투쟁을 시작으로, 10월 인민항쟁 직후 머물게 된 대구지역 사업장들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 관여하였다. 하지만, 노동자를 탄압하는 세력에 맞설 수 있는 ‘조직화된 노동자’가 없는 그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좌절은 그를 전략가로 만들었다. 70년대 세 차례나 한국노총 위원장선거에 출마했던 그는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위원장선거를 불법이라고 고발한다. 그러나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판사까지 쫓아내는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는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김말룡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이냐시오’가 된 김말룡은 명동성당 한 귀퉁이 건물에 명동노동상담소를 차리고 억울한 노동자들을 보듬어 안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노동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산재를 입고도 하소연할 곳을 못찾은 노동자들에게 끝까지 달라붙어 보상을 얻어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찾아오는 노동자들을 친근하게 대했다. 새벽같이 전화를 해도 볼멘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농성장에 찾아가면 일장연설이 아닌 현장의 소리를 들었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산재투쟁에 함께 했다. 그 외에도 쓰레기 매립시설, 정수장 수질관리, 골프장 건설억제 등 국회 환경노동위 위원으로써 그동안 국회의원들이 외면했던 많은 일들을 해냈다.
1993년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위증혐의로 위기에 처해있던 한국자동차보험이 노동위 위원들에게 돈봉투 로비를 한 것을 폭로한 그의 용기는 동료 국회의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의 나이 69세. 쉴 만도 한 나이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20대 청년노동자 조수원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한일병원의 젊은 지부장 김시자는 분신한다. 김시자는 생전에 김말룡을 만나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는 방법과 노조의 민주화에 대해 의논했다.
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