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1부 월남민의 탄생
1장 이산
북쪽에서 남쪽으로 / 교차하는 이방인
2장 이주와 정착
새로운 신분을 얻다 / 선택의 기로에서 신념의 세계로
3장 정체성
사회변동과 자기결정성 / 변화하는 정체성
2부 조국방문의 자화상
4장 이산가족과 평양의 해외동포 정책
남북대화와 이산가족 / 로동당의 해외동포 정책
5장 조국방문
월북자와 납북자의 유산 / 주체와 인민의 자화상 / 조국방문, 그 이후
6장 만남과 접촉
‘북한주민접촉’ / 만남 그 이상의 편지
3부 평화와 분단사회
7장 『뉴코리아타임스』
전충림과 전순영 그리고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 해외동포 이산가족찾기회 활동
8장 금단의 선을 넘다
평양과 토론토의 협력 / 자신을 증명하다 / 반공의 우상을 허물다
9장 분단사회의 평화통일운동
평화와 분단사회의 재구성 / 월남민과 북미주 평화통일운동
4부 월남 지식인의 근대 초상
10장 문학평론가 김우종
참여문학: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다 / 인본주의자의 사상과 문학세계
11장 법률가 김태청
일본 제국주의 교육과 자주성 / 법에 따른 통치와 시민의 주권성
12장 기독교 통일운동가 유태영
보수 종교인에서 반미주의자로 / 신앙과 통일운동의 전선에서
13장 기업가 오동선
이북에서 느낀 자아상실감 / 자기 존재의 의무와 경제발전의 소명
나가며 / 감사의 말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한국전쟁의 비극이 불러온 ‘이산가족’이라는 멍에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대한민국의 곳곳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전 국민의 눈과 귀가 KBS의 생방송 프로그램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에 쏠려 있었고 동명의 타이틀곡이 날마다 거리에 울려 퍼졌다. 휴전 후 처음으로 진행된 본격적인 이산가족찾기 사업에 무려 10만 건이 넘는 신청 사연이 답지했으며, 이 가운데 1만 180명의 이산가족이 상봉의 감격을 나누었다. ‘이산가족’이라는 단어가 모든 이의 일상에 스며들었으며, 남한에서 헤어진 경우뿐 아니라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몇십 년이 지나도록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 자체가 전쟁의 비극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한편 해외동포들의 이산가족찾기 노력은 남한보다 4년 앞서 시작되었다. 캐나다에서 『뉴코리아타임스』를 발행하던 전충림이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북미언론대표로 초청받아 평양에서 누나를 만난 일이 출발점이었다. 토론토에 돌아온 전충림은 선우학원 박사와 김재준 목사, 이승만 목사 그리고 일본에 있는 망명객 정경모와 논의해 1979년 8월 15일 해외교민가족찾기회 발기인 대회를 열고 본격적으로 조직작업에 나섰다. 이 같은 담대한 추진은 남한의 정치 상황이나 ‘냉전’ 중인 국제질서에서 매우 진취적인 움직임이었다.
첫발을 내디딘 해외동포 이산가족찾기회는 1980년 1월, 처음으로 다섯 명의 이산가족을 찾아달라고 북한 측에 신청했다. 그중 세 명의 가족을 찾아 평양을 방문해 상봉하기에 이른다. 1990년대 중반까지 『뉴코리아타임스』에는 이산가족의 평양방문사업에 대한 광고가 매주 실렸다. 『뉴코리아타임스』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1979년 발족한 해외동포이산가족찾기회는 1992년까지 12년 동안 미주동포 5,000여 명의 북한 방문을 주선해 가족 상봉을 이루었다. 미국과 캐나다는 물론이고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파라과이에 있는 월남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