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빛
아
일출
새는 말한다
흔들지 않고 흐른다
가득하다
산에 살던 사람은 산이 되고
내 세상
당신이 오라시면
가자
비 온 뒤 아침 햇살
살랑살랑
세상의 모든 것이고 싶어라
숲가에 서서
가벼움 또는 엄숙함 혹은 고요함
그래도 나는 너를 팔지 않을 수 없다
풀벌레에게 기울다
나, 꿩이지요
낙엽
청설모에게서 잣을 빼앗다
하루 그리고 한 해
그 순간만큼은
차이
가뭄
복잡한 그러나 단순한
그것참
붉은 밤
지금, 그리고
기어이 나도 물결이 되어
나
나무에 올라 길을 보다
구더기
허공
가뭄 끝에 빗소리
미안하다
강력한 힘과 번적 윤이 나는 몸매에 시퍼런 독가지
아아 아아, 앞으로
돼지 잡은 날
두껍아 두껍아
바보 달
흔적
어느 날 아침, 너구리를 잡다
우수수수
가을, 빗소리
끄덕끄덕
차가운 웃음
눈이 온 다음날
여명
시퍼런 밤
죽어서까지 둥근 몸이어야 했을가
절벽에 붙어선 산양을 보았다
아침
여우
토끼의 뒷다리는 길다
아침에 일어나 쥐를 잡다
애꿎은 꽃 한 송이만 꺾였다
또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얀 죽음
도살장에서
흐름
유월 십오일
산에는 무엇이 무엇이 사는가
칠월 십사일, 비
안개 낀 달밤
꾀가 많아서
삼월 삼일
빈 밭
낙엽송 숲 속에
예년에 비해 한 달 일찍 서리가 내렸다 한다
품
발정
다가오는 손
칠월
시월 십오일
시월 사일
한낮
나룻배
작품 해설 - 검은 새 한 마리와 산 / 김춘식
시인 유승도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가 출간된 것이 1999년이니까 햇수로 꽉 채운 8년 만에 나온 것이 바로 이『차가운 웃음』이다. 그 사이 시인은 한 권의 산문집 『촌사람으로 사는 즐거움』을 펴내었고, 이번 시집과 함께 두 번째 산문집 『고향은 있다』를 동시에 선보였다. 2007년이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그가 내놓은 이 두 권의 책은 무엇보다 그가 살고 있는 영월에서의 삶, 그 자연을 그 배경으로 한다는 데서 함께 읽어봄직하다.
도시를 사는 시인들의 시에 당연하게 등장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유승도의 시에는 자연이다. 숲도 나무도 청설모도 흑염소도 바람도 그가 부르면 친구처럼 온다. 그러니까 이 자연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시집 속의 자연은 앞선 시집과는 사뭇 다른 자세로 우리에게 온다. 첫 시집 속의 자연이 상처를 치유하는 작은 침묵처럼 고요하였다면 이번 시집 속의 자연은 입을 벌려 웃고 있는 채다. 하지만 그 웃음은 너무도 차다. 또한 숨길 수 없는 적나라함으로 그 빛은 아침에도 어둡다. 이는 무엇보다 자연의 본성인 삶과 죽음, 이 ‘운명’이라는 컬러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해설을 쓴 평론가 김춘식의 말대로 시인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그다지 관조적이거나 미학적이지 않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자연을 인간적인 친화력이 없는 도무지 인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세계로 그려낼 뿐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대입도 은유도 상징도 낄 틈 없고 오로지 현실만이 시집 전체에 생생하게 담겨서는 우리에게 서늘한 칼 한 자루를 손에 쥐게 한다.
푸푸 머리와 몸통 사이, 끊어진 기도를 통해 세상을 향해 토해내는 돼지의 거친 숨이 내 가슴으로 들어와 코로 입으로 뿜어져도 나는 고기를 씹는 입질만은 멈추지 않는다 쓰러지며 내지르던 소리 없는 날카로운 소리가 내 멱도 따겠다며 덤벼들어도 나는 입질을 멈출 생각이 없다.
-「돼지 잡은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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