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프롤로그 양면적이지만, 두개의 얼굴로만 설명할 수 없는 한?미관계
제1부 만남에서 동맹까지: 개항~1979년
제1장 한국과 미국, 첫 만남과 첫 배신
한·미, 그 첫번째 만남 | 조미수호통상조약의 함의 | 미국의 성장과 해외 진출 | 미국의 배신 | 조선의 미국 사랑과 갱스 오브 뉴욕 | 미국의 오판과 오만
제2장 분단과 한국전쟁의 기원, 그리고 미국
체험의 역사인가? 기록의 역사인가? | 수정주의 해석의 도전 | 군사편의주의설과 정치적 의도설 | 분단의 기원에 대한 내부 책임론 | 한국전쟁의 기원 |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누구의 책임인가?
제3장 미국의 전후 아시아전략과 1965년 한일기본조약
미국의 전후처리와 샌프란시스코체제 | 미국의 중재와 한·일 국교 정상화의 시작 | 한일기본조약 체결 | 한일기본조약 체결 과정의 한·미관계 함의
제4장 1965년 또 하나의 사건, 베트남전 파병
파병의 배경 |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의 전말 | 동맹과 전쟁 연루
제5장 닉슨 쇼크와 유신체제
1970년대의 국제 정세 | 닉슨독트린과 데탕트 | 데탕트 정책과 한반도 | 데탕트와 한·미관계 악화
제6장 카터의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수의 이중주
카터 행정부의 출범과 인권외교 |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관계 | 카터의 인권외교와 한·미관계의 부조화 |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미국의 역할 | 미국의 이상주의와 한반도 평화
제2부 신화가 된 동맹을 넘어: 1980년~2007년
제7장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미국
5·18민주화운동과 반미정서의 태동 | 미국이 한 일, ‘공모’와 ‘묵인’ 그 사이 | 6·10민주항쟁에 미국은 왜 개입했나? | “전두환 정권 수립, 미국의 한국 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일” | 미국은 과연 한국에 무엇인가?
제8장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미국
6·29선언과 노태우 정권의 출범 | 북방정책의 등장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 북방정책은 한국의 자율적 외교정책이었
한반도, 미국을 만나다
전쟁과 냉전을 거쳐 신화가 된 한미동맹
한?미의 첫 만남 이후 미국의 존재감은 우리 사회에서 점차 커져왔다. 특히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한미군사동맹이 형성되면서 견고한 협력체계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동맹으로서의 협력과 자국의 이익이 충돌하는 기로에 섰을 때 미국이 어느 쪽을 택해왔는지 속속 드러난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미국과 수교한 조선은 일본의 공격적인 개입을 미국이 견제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하고 간접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1945년 해방 직후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은 급박한 상황에서 내린 최선의 임기응변이라는 미국의 설명과 다르게 동아시아에서의 봉쇄정책의 일부로 신중히 고려된 정황이 이후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과정도 마찬가지다. 식민지배 당사자와의 때 이른 국교 회복과 오늘날까지 불씨를 남긴 청구권 협정은 샌프란시스코조약(1951과 한미상호방위조약(1953으로 형성된 한?미?일 삼각동맹의 완성을 위해 미국이 한국 정부를 지속적으로 압박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한국 군사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정당성의 부재를 만회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에 동의한 데 이어 베트남전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미국의 주한미군 및 한국군 감축 계획을 되돌리려 했으나 파병의 댓가로 과도한 조치를 요구하면서 역설적으로 미국과 불편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10?26사건 이후 집권한 신군부는 쿠데타와 광주에서의 학살 등 폭력사태를 통해 집권한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에 더욱 의존했다. 미국 레이건 정부가 닉슨 정부의 데탕트를 폐기하고 냉전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신군부의 상황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전두환 정부는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쿠데타와 광주 5?18민주화운동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비판이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