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과 『로마사 논고』│강정인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차노비 부온델몬티와 코시모 루첼라이에게 드리는 인사
제1권
서문 역사의 가치
제1장 도시 일반의 기원, 특히 로마의 기원에 관하여
제2장 얼마나 많은 종류의 국가가 있는가 그리고 로마 공화국은 어떤 종류의 국가에 속하는가
제3장 로마에서 호민관을 창설하게 된 경위?국가를 더욱 완벽하게 만든 사건
제4장 평민과 원로원의 대립이 로마 공화국을 자유롭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제5장 인민과 귀족 중 어느 편이 더 확실하게 자유를 보호하는가 그리고 새로이 권력을 얻고자 하는 자와 기존의 권력을 보유하고자 하는 자 가운데 어느 편이 분란의 원인인가
제6장 로마에서 인민과 원로원 간의 대립을 소멸시킬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는가
제7장 공화국에서 고소·고발권(le accuse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제8장 고소·고발은 국가에 이로운 반면, 중상은 해롭다
제9장 새롭게 공화국을 창건하거나, 구제도를 철저히 혁파하여 공화국을 쇄신하는 일은 한 사람이 단독으로 해야 한다
제10장 공화국이나 왕국의 창설자는 명성을 누려야 하는 반면, 참주정치의 시조는 응당 비난을 받아야 한다
제11장 로마인들의 종교에 관하여
제12장 종교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이탈리아가 로마 교회의 처신으로 파멸에 처하게 되었는가
제13장 로마인들은 도시의 여러 제도를 개혁하고 각종 사업을 수행하고 내분을 수습하는 데 종교를 어떻게 활용하였는가
제14장 로마인들은 새점(鳥占을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해석했으며, 심지어 종교가 요구하는 바를 무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종교를 준수하는 외양을 신중하게 유지했다; 그리고 누구든 성급하게 종교를 경시하면, 그를 처벌했다
제15장 삼니움인들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최후의 수
마키아벨리,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최고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작가, 정치가, 정치이론가였다. 1498년 30세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하여 외교사절의 임무를 띠고 프랑스 루이 12세의 궁정에 파견되었다. 당시 피렌체 사신의 주된 임무는 피렌체의 피사 공격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군사적 협력을 구하는 것이었다. 1503년에는 로마에 파견되어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를 근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율리우스 2세는 직전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의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의 도움으로 교황이 되었는데, 이후 단호한 행동으로 세력을 불려갔다. 마키아벨리는 율리우스 2세의 처세술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훗날 집필하게 된 『군주론』은 외교사절로서 겪은 생생한 체험과 관찰에 근거한 것이다.
1512년 메디치가가 피렌체를 다시 다스리게 되면서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해에 메디치가를 몰아내려다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투옥되기에 이른다. 곧 특사로 풀려난 그는 공직에 참여하기 위해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그 계획의 하나로 『군주론』을 1513년 말경에 집필했다. 하지만 책을 헌정한 로렌초 메디치(Lorenzo de Medici는 들춰보지도 않았다고 하니 마키아벨리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다만 이 시기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들과 만나기 시작했는데, 이들과의 교류에서 공화정의 의미와 가치에 눈뜨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의 『로마사』의 처음 10권에 대한 논평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로마사 논고』다. 마키아벨 리의 가장 큰 저서인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마키아벨리와 마키아벨리즘,
근대의 기원을 열다
마키아벨리가 근대 정치사상사에 남긴 탁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