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감사의 말
화이트채플, 홀리스를 만나기 전
홀리스, 화이트채플과 일하기 전
이날 할 일, 1969~73년 / 작품, 1969~73년
공백기, 1973~78년
“더 전문적으로, 더 야심적으로”, 1978~85년 / 작품, 1978~85년
여파
재료와 공정
도판 출전
참고 문헌
역자 후기
색인
두 주인공, 만나기 전
책은 두 주인공인 리처드 홀리스와 화이트채플이 서로 만나기 전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1872년 세인트메리 성당에서 부제로 일하던 새뮤얼 바넷은 런던 주교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당시 “교구에서 가장 끔찍한 사목구로, 주민 대부분이 범죄자”인 런던 동부 세인트주드의 허물어진 교회 하나를 맡아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갓 결혼한 바넷 부부는 이곳에 정착해 첫 사업으로 빈민을 위한 도서관을 짓는다. 1881년 “회화와 도자기, 자수 등 진귀품을 대중에게 보여 주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처음 연 전시회에 약 1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이후 전시는 연례행사가 된다. 런던 최초의 공공 미술관 중 하나인 화이트채플 미술 갤러리의 시작이었다. 교회 인근에서 일명 ‘잭 더 리퍼’가 연쇄 살인을 저지르던 1888년에는 약 5만 5천 명의 관람객이 전시회를 찾았다. 이후 1901년 정식으로 문을 연 화이트채플은 서서히 “영국을 선도하는 동시대 미술 중심지”로서 명성을 쌓아 나간다. 특히 현대 미술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이것이 미래』(1956 전시를 열고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을 영국에 소개한 브라이언 로버트슨 관장 시절(1952~68 무렵에는 “화이트채플에서 전시회를 열고, 도판과 함께 잘 정리된 도록을 내는 것은 야심적인 미술가의 이력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자 평단의 인정에 성큼 다가서는 길이었다.”
또 하나의 주인공 리처드 홀리스는 1934년 런던 서부 첼시 지역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그리 어렵지 않아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1949년까지도 책을 만들 때 “종이 두께, 여백, 활자 크기, 심지어 한 면당 단어 수까지 제한되던” 전쟁 상황은 그에게 평생 이어지는 청교도적 태도를 새긴다. 이후 첼시 미술 대학에 진학해 미술가를 꿈꾸던 그는 흠모하던 미술가 윌리엄 턴불로부터 “자네,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어야겠군”이라는 작품 평을 듣고 낙담한 후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교육자로서 경력을 쌓아 나갔다.
화이트채플과 리처드 홀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