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 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趙孟?·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 글이나 그림 따위의 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함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心意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蘭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