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껍질 두개골 원칙
1889년, 미국 위스콘신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년이 같은 반의 다른 학생을 장난삼아 발로 살짝 찼는데 하필 맞은 정강이 부위가 이전에 다친 곳이었고, 그로 인한 세균 감염으로 피해 학생은 한쪽 다리를 거의 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재판부는 피해 학생이 다리를 못 쓰게 된 책임이 가해 학생에게 있다고 판결하였다.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이란 이처럼 불법적 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하여 원인 제공자가 모든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영미법상의 유명한 법률 원칙이다. 계란껍질만큼 얇은 두개골을 가진 사람의 머리를 한 대 쳤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면, 가해자는 피해자의 사망에 대한 책임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주 퀸즐랜드 지방법원에서 재판연구원으로 근무한 브리 리는, 이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을 성범죄 사건이 지니는 특수성과 연관지어 사법 시스템의 부당한 현실을 고찰하고 나아가 그 한계를 지적한다. 특히 저자는 성폭력 생존자가 겪는 피해의 연속성과 심각성에 주목한다. 단 한 번이라도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가해 행위의 경중과 관계없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수 있으며, 그렇기에 피해자가 얼마나 연약한지와는 상관없이 가해자는 상대의 모든 피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대개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욕망보다 자신의 욕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지른다. 범행 동기에 대단한 이유랄 것은 없다. 그 사람 역시 단지 그러고 싶었기 때문에, 내 의사와 감정은 철저히 무시해도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내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는 성적 호기심과 만족감을 충족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는 내가 받을 충격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린아이를 성추행하는 것은 그 아이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인격과 신체를 짓밟는 짓이다. 아직 굳지 않아 보드랍고 여린 마음을 영구적으로 망가뜨리는 짓이다.” (4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