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치원의 광야 소리’ 시리즈를 내며 / 7
I. 들어가는 아니리
1. ‘정직한 절망’에 대한 시론(時論 / 16
2. 윤동주, 본회퍼, 루터가 나에게 남긴 유산 / 27
II. 저항과 복종 - ‘사이’의 존재가 가야 할 길
1. 존재의 변화 / 38
2. 교회와 목회자, 조롱거리로 길거리에 나뒹굴다 / 49
3.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 55
4. 성직매매가 낳은 종이 한 장의 위력 / 75
5. 저항의 목소리, 공적 무대로 올리다 / 89
6.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 소리인가? / 96
7.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100
8. 새로운 날의 도래를 알리는 ‘비텐베르크의 나이팅게일’ / 113
9. 신앙의 탈을 쓴 맹종과 성경 및 이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저항 사이에 / 119
III. 목회자의 특권 의식을 허물다
1. 파계(破戒를 다르게 읽는 독법(讀法 / 126
2. 성직자들이 쌓은 여리고 성, 나팔 소리를 만나다 /132
2.1 영적 권위(auctoritas와 세속적 권력(potestas / 132
2.2 거룩한 비판 / 134
3. 루터, 조작된 교리에 맞서다 / 146
3.1 화폭에 담긴 만인사제직 / 146
3.2 만인사제직: 세례를 받고 믿는 자라면! / 149
3.3 영적 제사장과 소명 / 159
4. 신자의 실존: 영적 제사장으로서의 세상 속 수도사 / 162
IV. 교회, 너는 어디에 있는가?
1. 원수들 한가운데! / 166
2. 아우구스티누스 대(對 아우구스티누스? / 169
3. 교회 대(對 교회, 두 진영 사이에서 / 173
4.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듣는 곳 / 186
5. 보라, 저기 훌륭한 설교를 하는 멋진 짐승이 지나간다! / 198
6.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 / 206
7. 나의
<책속에서>
헛된 희망과 거짓 희망이 너무도 값싸게, 그러나 너무도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교회에서 정말 필요한 복음은 ‘정직한 절망’이다. 이것은 희망이 없는 캄캄한 심연이 아니라, 희망의 씨앗이 발아하는 생명의 어둠이다. 헛된 희망과 거짓 희망에 대해 저항의 물길을 열고, 비로소 희망의 물꼬를 트는 정직한 눈물이다.
- 22쪽
절망을 죄악시하고 장밋빛 희망만을 남발하는 교회 문화는 희망이 없다. 희망이라는 모양은 있지만, 희망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희망의 능력은 절망 속에서 움트고, 절망을 관통하며 꽃봉오리를 맺고, 절망 너머에서 꽃을 피운다. 지금은 절망이 없는 희망을 파는 거짓 복음을 거절하고, 정직한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로 희망의 수로를 놓아야 할 때다.
-23~24쪽
(나는 루터와 함께 ‘교회에 대한 절망’을 말하고 싶다. ‘기독교에 대한 절망’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희망하는 희망’으로만 가득 찬, 그래서 맛을 잃은 ‘신앙’ 대신에 ‘정직한 절망’이라는 용어를 붙잡고 싶다. … ‘정직한 절망’에 대한 용기, 어쩌면 이것이 신앙의 다른 말이 아닐까?
- 26~27쪽
‘저항과 복종’은 본회퍼의 삶과 신학만 묶을 수 있는 배타적인 용어가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나치 종교와 같은 것이 판을 칠 때면 어김없이 저항과 복종의 삶으로 시대정신과 싸웠던 이들이 있다. 이 신도 섬기고, 저 신도 섬기고자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자신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선언하는 여호수아나, 야훼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쪽을 택하라고 외친 고독한 엘리야처럼 말이다.
이런 전통의 흐름 속에 루터도 서 있다. 그는 자신의 실존을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직시하고, 이 ‘사이’의 존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으로 저항과 복종의 삶을 살았다. 이것을 꿰뚫어 본 루터 전문가 하이코 오버만(H.A.Oberman은 자신의 루터 전기에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 있는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