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왜 ?독재자 이승만’ 평전인가 5
1. 젊은 날의 이승만, 출생과 성장
격동기에 태어나 서구사상의 세례를 받다 17 / 언론인 및 개혁정치가로 성장하다 30
2. 일신의 영달을 앞세운 ‘겉치레’ 독립운동
초기 외교활동의 실패 그리고 미국 유학 59 / 짧은 귀향, 긴 미국 생활 79 / 일신의 영달에 기운 교포사회의 ‘문제아’ 이승만 88
3. 분열을 부른 야망, 순진한 외교주의
탄핵당한 임시정부 대통령, 현실성 없는 외교독립론 109 / 태평양전쟁기의 외교활동과 독선에 따른 과오 138
4. 자주독립 민족통일을 외면한 권력의 화신
해방정국의 주역으로 등장, 분단정부 수립에 올인 161 / 권력에 눈멀어 ‘민족’을 외면한 ‘또 다른 반역’ 189
5. 실질 없는 허세만 일삼다가 전쟁을 부른 무능 대통령
반민주폭압체제 구축하면서 민족민주세력 제거 211 / 백범의 암살 배후, ‘보이지 않는 손’ 이승만 226 / 6·25 전쟁, 피난 수도에서 민주주의 압살 257
6. 상상을 뛰어넘는 정치의 모든 악행, 그리고 파멸
기발한 꼼수 정치로 권력 연장 291 / 막장으로 치닫는 정권, 망령 들어가는 독재자 320 / 정치보복의 극치 ‘조봉암 처형’의 내력 352
7. ‘검은 머리 미국인’ 이승만의 슬픈 귀거래사歸去來辭
파멸의 무덤을 판 늙은 독재자의 권력욕 375 / 혁명의 불길에 ‘껍데기’로 사그라진 독재자 392
에필로그: ‘독부’ 이승만이 민족반역자이자 민주반역자인 증거 411 / 이승만 연보 418 / 주註 424
언론과 사회운동으로 일제와 싸우다
이승만은 5살 때 천자문을 뗄 만큼 명석했으나, 13살 때부터 응시한 과거시험에는 번번이 낙방했다. 과거제가 이미 부패해질 대로 부패해져 돈과 권력의 배경이 없던 이승만이 급제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1894년에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이승만은 신학문에 눈을 돌려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1895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얻는다. 즉, 기독교를 접하고 미국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또 서재필의 강의에 감명을 받게 되고, 협성회를 조직하는 데에도 참여한다. 배재학당 졸업식에서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영어연설로 일약 서울 장안의 주목받는 청년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승만은 이렇게 서구식 재능과 사고를 갖추고 사회에 진출한다.
그는 1898년 1월에 ≪협성회보≫를 창간하며 언론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때 사회개혁과 국민계몽을 내용으로 하는 논설을 쓰며 사회의식을 깨친다(≪협성회보≫는 ≪매일신문≫으로 이름을 바꿈. ≪매일신문≫이 종간되자 이승만과 동지들은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이승만은 주필로 활약했다. 이승만의 정치활동은 독립협회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협성회 활동을 바탕으로 독립협회의 신진 소장파 일원으로 주목받고, 반외세·반침략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승만은 이렇게 언론과 사회운동으로 항일투쟁을 벌이며 두각을 나타냈다.
6년여의 감옥생활,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다
이승만의 왕조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식이 더 강화될 때, 고종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이승만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중추원 의관에 임명한다. 그러나 1898년 1월에 중추원 의관 활동이 끝나고 며칠 뒤, 이승만은 정부전복음모 혐의로 구속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승만은 6년여의 감옥생활에서 학문과 사상적으로 도약하고, 영어에 능통하게 된다. 스스로 “감옥생활에서 내가 받았던 축복에 대해 나는 평생 감사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출옥한 이승만은 상동청년학원 교장으로 3주 지내다가 돌연 미국으로 떠난다. 일본의 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