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만들어나가는 것”으로서의 조선영화
제1장 프롤레타리아 영화와 종족지(ethnography 사이에서
1. 병약한 사람의 살아가는 생리
2. 아메리카니즘에서 러시아니즘으로
3. “우리들의 영화”
4. 매혹적인 카니발리즘
5. 자본주의적 사실
보론 1 “발달된 반동영화”, <메트로폴리스>(1927
보론 2 일본 프로영화 담론의 ‘식민지 영화’-<아세아의 람(嵐>(1928의 경우
제2장 조선영화라는 (불안정한 위치-「조선영화발달소사」(1941의 생산
1. ‘조선영화’의 발견
2. ‘공식적인’ 영화사 생산과 ‘고전’의 확립
3. ‘아시아 영화’와 조선영화
4. 해방 후…
제3장 영화사(史의 좌표와 ‘예술성과 기업성’의 변증법
1. ‘예술성과 기업성’의 변증법
2. “조선영화의 예술적 성격”-농촌·묘사·정서
3. 아시아에서 ‘전시’되는 내선일체
4. “만들어나가는 것”으로서의 국민영화
보론 대지, 전체주의, 기록성-<복지만리>(1941가 실패한 이유
제4장 조선영화의 존재론-「조선영화론」(1941을 중심으로
1. ‘영화령’을 전유하며 말하기
2. 조선영화의 존재론-영화는 예술‘이다’
3. 조선영화의 토대
4. 조선영화의 환경
5. 예술의 수단
부록-자료
=영화평론=
1. 「위기에 임한 조선영화계」(매일신보, 1926.6.13·20
2. 「심심풀이로」(매일신보, 1926.8.8
3. 「조선영화를 이렇게 성장시키자-평(評과 감독의 대중적 감시를」(조선일보, 1928.4.29~5.4
4. 「조선영화가 가진 반동적 소시민성의 말살-심훈 등의 도량에 항하야」(중외일보, 1928.7.28~8.4
5. 「최근 세계영화의 동향」(조선지광 83, 1929.2
6. 「영화적 시평(時評」(조선지광 85, 1929.6
7. 「조선영화의 제경향에 대하여(朝鮮映畵の諸傾向に就いて」(新興映畵, 1930.3
8. 「서울키노 <화륜(火輪>에 대한 비판」(조선일보, 1931.3.25~4.3
9.
영화인 임화
잘 알려져 있듯이 임화는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등 ‘현장’에 오랫동안 몸담기도 했다. 1927년 가입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서 만든 <유랑>(1928과 <혼가>(1929, 그리고 카프 서기장 시절 청복키노에서 제작했으나 개봉되지 못한 <지하촌>(1931과 <최후의 승리>(1936에 이르기까지 총 네 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서광제와 함께 <북풍>(1939을 각색하려 하기도 했다.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설립한 최남주의 출판사 학예사에서 일했고 1940년부터는 이창용의 고려영화사에 입사하여 문예 일을 맡아 하는 등 거물 사업가들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다. 임화가 1941년 ‘공식적인’ 조선영화사인 「조선영화발달소사」의 집필자가 된 데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계 인사로서의 위상만이 아니라 이렇게 조선영화의 초기부터 깊숙이 관여해왔던 이력도 크게 작용했다.
20편이 채 못 되는 영화평론을 남겼지만, 임화는 조선에 영화 비평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던 1926년에 쓴 「위기에 임한 조선영화계」부터 일본 프롤레타리아 영화잡지 신코에이가[新興映畵]에 쓴 「조선영화의 제경향에 대하여(朝鮮映畵の諸傾向に就いて」(1930, 중일전쟁기 ‘조선영화령’ 시대에 조선영화의 “근본적 성격”을 논파한 「조선영화론」(1941 등 조선영화사의 중요한 계기들에 개입하는 가장 중요한 입론들을 내놓았다.
임화가 처음 쓴 영화평인 「위기에 임한 조선영화계」(1926는 영화평론이라는 글쓰기가 불과 4~5편밖에 제출되지 않았던 시점에, 그것도 ‘조선영화’에 대한 평론은 드물었던 때에 발표된 글이다. 이후 1930년대 초까지 그가 쓴 영화평들이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다른 영화인들과 ‘논쟁’을 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 데 비해, 이 글은 특정한 이념에 기반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 조선영화의 상황을 “위기”라 진단하면서 그 원인과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다. 즉 임화는 처음부터 자신의 관점을 내세우고 현실에 개입하는, 그가 평론의 성격으로서 중시했던 ‘비판적’ 글쓰기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후의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