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백봉 여사 무용_1957
2. 새로운 출발_1957
3. 서울의 하루_1957
4. 자유의 소리_1957
5. OEC와 한국부흥_1958
6. 농부를 돕는 사람들_1958
7. 만송 이기붕_1958
8. 순종황제 장례식_1958
9. 식물원을 찾아서_1958
10. 우리 예술사절단 동남아세아로_1958
11. 가정 교도원_1959
12. 건강한 어머니와 어린이_1959
13. 대관령의 겨울_1959
14. 발전은 협력에서_1959
15. 새로운 돼지 울_1959
16.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_1959
17. 밝아오는 내일_1960
18. 울릉도_1960
19. 흘러간 옛노래_1960
20. 가족계획_1960
21. 재일교포 고국 방문_1961
22. 개미와 베짱이_1962
23. 국제음악제_1962
24. 나는 간첩이었다_1962
25. 농가방송토론그룹_1962
26. 아시아영화제_1962
27. 의자공과 소년들_1962
28. 피 어린 600리_1962
29. 한국의 초대_1962
30. 협동조합_1962
31. 112_1963
32. 나는 물이다_1963
33. 농사자금_1963
34. 모정의 뱃길_1963
35. 배격하자 외제품! 애용하자 국산품_1963
36. 원호센타의 하루_1963
37. 인민재판_1963
38. 잘 살 수 있는 길_1963
39. 한국의 불교(열반_1963
40. 미터법을 쓰자_1964
41. 어둠이지나면_1964
“문화영화”라는 용어는 정확한 개념 규정이 어려운 용어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문화영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독일 우파(UFA의 ‘Kulturfilm’이라는 용어를 수입하여 ‘문화영화’로 번역하고 이를 국내 언론에서 차용(??동아일보?? 1926년 5월 16일했을 때부터였다. 이 시기부터 문화영화는 “극영화가 아닌 것”(일제 말기, “실사 기록을 위주로 한 것”(이승만 정권기, “사실 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박정희 정권기 등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정의되어 왔다. 또, 문화영화는 <팔도강산>(배석인, 1967과 같이 극화된 영화부터 <홍길동>(신동헌, 1967과 같은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문화영화라는 개념이 이 같은 복잡성을 가지고 있음을 감안하여, 본 연구팀은 한국정책방송원 KTV국민방송의 e영상역사관(www.ehistory.go.kr에 ‘분야별 기록영상’으로 분류된 이 영상들을 “문화영화”로 분류한다. 카탈로깅한 영상들이 주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영상이며, “문화영화”는 이 시기 국립영화제작소 제작 영화들을 통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영화를 제작한 국립영화제작소는 1948년 7월 발족된 공보처 공보국 영화과로 시작되었다. 공보국 영화과는 <대한뉴스>를 비롯한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를 생산했으며, 1961년 6월 공보부 공보국 영화과로 재편되면서 국립영화제작소(소장 이성철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후 1994년 국립영상제작소로 개명했다가 1999년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 2004년 영상홍보원, 2007년 한국정책방송원으로 재편되었다. 1950년대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했던 문화영화들은 현재 한국정책방송원 KTV국민방송의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의 ‘분야별 기록영상’에서 서비스되고 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관련 시기 영상은 1956년 <이승만 대통령 부석사 시찰>을 시작으로 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