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끝없는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비극이다
1. 이순신의 죽음
2. 이순신은 나를 버리고 나라 위해 죽었다(忘身殉國
3. 이순신의 시신은 왜 고금도(묘당도로 갔는가?
4. 이순신의 비석은 어디에 있는가?
5. 명 수장(明 首將들은 이순신을 옹호하였다
6. 이순신을 왜 성웅(聖雄이라 하는가?
취도(鷲島, 吹島 포탄탑(砲彈塔의 한시(漢詩는 누가 썼는가
1.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1904~1905
2. 淸●日해전(Sino-Japanese Naval Battle, 1894
3. 러●일해전(Russo-Japanese Naval Battle of Tsusima, 1905
명량해전은 명량대첩(鳴梁大捷이 아니고 벽파대첩(碧波大捷이다
1. 명량해전의 이해를 돕는 자료
2. 명량해전은 명량대첩이다
3. 명량해전은 벽파대첩이다
4. 이순신이 효수한 「馬多時」는 왜장 小早川隆景이다
부록
1. 선조(宣祖와 이순신(李舜臣
2. 농성(農城
3. 성웅 William Wallace(월염 월러스
모든 고문(拷問은 경중(輕重에 관계없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람을 끝내 죽음의 문턱으로 끌고 간다. 즉 결국 오래 살 수 없다. 이순신은 고문을 당한 후 1년 7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조선(朝鮮의 국왕 선조(宣祖는 이순신을 고문으로 확실하게 죽이려고했다. 충효(忠孝가 강조되고 있는 조선사회에서 국왕과 신뢰관계가 끊어진 이순신은 충(忠을 잃고 어머니가 죽은 후 장례를 치르지 못한 그 아들은 효(孝를 잃었다. 충효를 다잃은 이순신은 삶의 애착을 잃고 결국 순절( 殉}節의 길을 택한다
상복(喪服으로 백의종군 중 선조국왕은 병선(兵船 한 척도, 화포도, 장수와 군사도, 군량미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 속에서 이순신을 조선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여 교서 한 장만을 손에 쥐어주고 다시 남쪽 최일선으로 잔인하게 내려보냈다. 그러나 통제사 이순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병든 몸으로 오로지 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왜적과 싸워 명량 및 노량해전에서 대첩(大捷을 거두고 최후의 전쟁 결전장 관음포(觀音浦에서 자기의 목숨을 「기러기 털(鴻毛」처럼 가볍게 버렸다. 이를 류성룡(柳成龍은 「망신순국(忘身殉}國」, 숙종국왕은 현충사 사액제문(賜額祭文에서 「살신순절(殺身殉}節」, 이민서(李敏敍는 명량대첩비에서 「졸이신 순국(卒以身 殉}國」, 남해 충렬사 창건기에서는 「사신순국(捨身殉}國」이라 했다. 그리고 선조실록(宣祖實錄 31년 11월 27일 사관(史官은 「단충허국 망신사의, 석호(丹忠許國 忘身死義, 惜乎」라고 했다. 즉 「이순신은 온 힘을 다하여 지극 충성으로 나라를 구하고 대의(大義를 위해 몸을 버리고 죽었다. 참으로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라고 하여 이순신의 죽음을 매듭지었다. 선조국왕은 이순신의 「삶의 마음」을 죽였고 왜적의 총탄은 이순신의 육신을 죽였다. 결국에 이순신은 살아도 살지 못하는 한스러운 조선 파당정치 즉 당쟁이 이순신을 죽게 만들었다. 이를 이민서(李敏敍는 이순신의 죽음은 당화(黨}禍라 했다.
이순신의 시신을 소달구지에 실어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