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自序
교사에서 식모로 9월 1일
불쌍한 ‘머저리’들 9월 2일
기억의 재편성 : 추억 9월 3일
자랄수록 더욱 아름다워졌지만 9월 4일
한 천재의 죽음 9월 5일
영감님과 돌아오지 않는 아들 9월 6일
달빛에 반사되는 눈물 9월 7일
미스터 주(Mr. 朱 9월 8일
‘춘래불사춘’-김순희 9월 9일
어머니 9월 10일
환경에 순응하라 : 세 개의 이름 9월 11일
사할린으로 끌려온 이야기 9월 12일
금년에는 설마 9월 13일
내가 네 품에 안길 수 있을 때까지 9월 14일
3만 명 조선인의 목소리 : ‘조국아, 아우야, 아들아’ 9월 15일
춘계 류시욱 생의 발자취
산속에서 쓴 보름간의 일기(山中半月記
이 책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잊혔던 한 남자가 남긴 기록이다. 역사 연구를 업으로 삼은 내가 운명처럼 만난 사료, 식민지 시대를 전후한 시기에 조선과 사할린에서 살았던 한 사람의 육성이다. 수많은 이들이 여러 사건들이 얽히고설키는 역사 속에 등장했다가 사라져갔다. 그중에 역사가 된 이름은 많지 않다. 당대에 부귀공명을 누린 이들도 역사책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다. 이 글의 주인공은 그런 반열에 드는 사람이 아니다.
사할린으로 동원되었다고 신고된 수많은 이들의 고통에 가슴만 아파할 뿐 객관적인 피해판정의 근거를 찾지 못해 고민이 깊어갈 그 시점이었다. 그의 노트가 내 앞에 나타난 그 기적의 순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정성들여 작성된 고운 필체. 펜에 잉크를 찍어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 143쪽짜리 보름 치 일기였다. 단아한 필체로 미루어 글쓴이는 침착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한시와 자작시까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글쓴이는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 틀림없었다. 보름 동안 잠시간의 짬을 이용하여 단숨에 써내려갔을 터인데도 지우거나 고친 흔적이 거의 없었다. 자기의 기억과 주장을 정연하게 표현할 줄 아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가 분명했다. 그렇게 류춘계 선생은 내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부귀영화나 명성은 그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출생과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순탄한 일생을 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유서 깊음이 느껴지는 고실촌(古室村에 자리하던 서애 류성룡 선생 집안에서 13대 주손으로 그는 태어났다. 4대를 독자로 이어 온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더없는 기쁨이 된 그에게 어머니가 붙여주신 첫 이름(아명은 ‘성화’였다. ‘시욱’이라는 이름을 준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소학교에 간 그는 총명하고 문학적 재질도 드러내며 어른들의 기대를 받았다. 스무 살도 되지 않아 청진과 서울을 다니며 제법 번듯한 기업의 촉망받는 일군으로 뻗어나갔으며,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