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륄의 기독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평을 읽는 것은 마치 외과 수술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왜 그의 수술에 탄복하는가?
자끄 엘륄에게 기독교는 기원과 계시의 개념 자체 때문에 반이데올로기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에 대해 지나친 증거들을 제공함으로써 기독교를 순식간에 이데올로기로 변형시켰다. 교리, 신앙, 자유의 엄격한 실천이 그룹 전체를 위한 타협과 가담의 담화로 가치 절하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룹의 행위나 자신의 행위를 위한 논쟁과 정당성을 찾으려 성경을 읽는 순간 우리는 수많은 기독교적 이데올로기 안에 머물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일까? 이런 측면에서 검토한 마르크스주의적 기독교인들의 입장은 우리 시대의 기독교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란 말인가?
마르크스주의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양립할 수 없을까?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의 지지를 신학적으로 합법화하는 사고의 흐름이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이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아주 신나게 선포하며 복음서의 새로운 독서를 설립한다. 신학 자체까지 모든 것이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마르크스주의가 발견토록 하는 계급투쟁에 따라 재고되려 한다. 이런 역설적 흐름은 마르크스주의가 지나가는 시점에, 마르크스주의 한복판에서, 정체성과 신뢰성의 위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서도 확인된다.
시간이 흐를 수록 복음은 문화와 타협하면서 조각난다.
여기에 엘륄의 통찰력이 말하는 진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