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
대한민국 역사학, 혁명의 첫 발을 내딛다
사고전서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보다 앞선 새로운 낙랑자료 대거 발굴,
오랜 고대사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한국사의 척추를 바로 세운 책, 드디어 출간
이 책의 시대적 가치
1, 낙랑은 한국사의 척추다
낙랑군은 서기전 108년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여 설치한 한사군의 하나이다. 그런데 낙랑군에 조선현이 있었고 고구려의 발상지 또한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의해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발상지와 위치 등 우리 고대사의 무대 범위가 결정 된다. 따라서 한사군의 낙랑군은 한국사의 척추에 해당한다.
2. 현재 대동강 낙랑설 바탕으로 국사교과서 기술
낙랑군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집약해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정리 된다. 하나는 낙랑군이 한반도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단의 대동강유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으로 이러한 주장은 이병도 등으로 대표된다.
다른 하나의 주장은 낙랑군이 중국의 요동 또는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보는 것으로 신채호, 정인보, 리지린, 윤내현 등의 관점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재 이병도 등이 주장한 대동강낙랑설이 학계의 정설로 인정되어 이를 바탕으로 국사교과서가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발상지와 활동무대가 모두 대륙과는 무관한 대동강, 압록강유역으로 한정된 반도사로 규정된 상태다.
3.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중국의 하북성 동쪽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발해를 끼고 있었다
사고전서 사료에 의거하면 서한 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 현도, 낙랑을 설치했다”라고 했는데 그 갈석산은 하북성 남쪽 오늘의 호타하유역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은 후대에 붙여진 명칭이고 한무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