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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변하는 세상에 맞선 유학자 (사교재 김영익 1886-1962문집
저자 김영익 저,하영휘
출판사 너머북스(너머학교
출판일 2019-11-25
정가 29,000원
ISBN 9788994606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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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가사 歌辭
송곡농사 해방기념 가사_1945년 7월

편지 便紙
신식학교의 학생군사교육 〉 이인서李仁瑞와 임석영林奭榮에게 줌_1908년
공부하는 학동들에 관한 보고 〉 노백老柏 선생께 올리는 편지_1915년 11월
뫼시며 배우고 싶은 마음 〉 간재艮齋 선생께 올리는 편지_1916년 6월 25일
일제의 앞잡이 토이土夷 〉 조재원趙載元 도형道亨에게 줌_1917년 윤2월 16일
변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노백 선생 전상서_1919년 4월
민성民性의 순화는 도道가 높은 학자의 임무 〉 노백 선생께 올림_1919년 7월
강학講學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 박계朴?에게 줌_1919년 10월 6일
노백 선생의 제의를 받고 〉 노백 선생께 답함_1920년 1월 24일
스승 노백이 제자 사교재를 선생으로 초빙하는 편지_1920년 1월 23일
섬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강학講學으로 〉 노백 선생의 편지에 답함_1920년 1월 28일
노백,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상황’_1920년 2월 1일
친구는 섬으로 들어가고 〉 전완全浣에게 답함_1920년 3월 25일
강상綱常을 부지하는 선생, 간재艮齋 〉 간재艮齋 선생께 올림_1920년 7월 9일
최모 문제 〉 이형렬李亨烈에게 답함_1922년 5월
석전강사石田講舍에서 최모에게 절교를 알리는 글_1922년 윤5월 9일
함경도의 동문에게 보낸 편지 〉 허순영許順泳 경천景天에게 답함_1923년 6월
섬으로 들어간 은자隱者에게 〉 김이청金夷淸 병로柄老에게 답함_1923년 8월 6일
공公과 사私 〉 김이청金夷淸에게 줌_1924년 4월
간재艮齋 사후 그 문인들의 난맥상 〉 석농石農 선생께 올림_1924년 8월
철원에서 돌아와 광교산에 은거함 〉 김경하金景河 씨에게 보내다_1933년 7월 보름
일제강점기에 세운 정려각 〉 안재하安在夏에게 주다_1948년 5월
구도의 길 〉 허담許潭에게 줌_1948년 8월
친구의 손자를 가르치며 〉 야당野塘 유득로柳得老에게 답함_1
유학자의 눈으로 본 전환기 사회사

사교재 김영익 문집『변하는 세상에 맞선 유학자』에는 가사, 편지, 잡저와 서·기·제발·일기, 전기, 한담수록과 봉래산고, 어록, 교훈, 종중, 답문, 산록 등 전통적인 문집 편목 체제에 따라 그가 남긴 자료 중 모두 228편의 글이 실려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글은 1908년의「신식학교의 학생군사교육」(31쪽이다. 신식학교에서는 이미 일제의 압력으로 학생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사교재는 이 학생들이 장차 일제의 총알받이가 될지도 모른다 경고한다. 이어지는 문집의 전편에서 새로운 제도와 문물이 점점 확산되던 전환기에 유학의 맥을 잇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절박한 사교재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말년의 편지「경서 팔기」또한 그 맥락이다. 친구가 팔아달라며 맡긴 『논어』,『맹자』등 유학 책을 헐값에 팔고 쓴 편지다. ‘지금은 공자를 공자로 받들지 않고 맹자를 맹자로 받들지 않는 시대’라며 사교재는 변해가는 자기 시대를 말한다.
이 책은 일제, 미국과 소련 등 외세의 지배에 대한 한 유학자의 적극적인 대처는 물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등의 신문물에 대한 사교재의 생각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사교재는 반일사상이 강하지만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중화주의자이며, 그의 중화주의는 중국 고대의 세련된 주나라 문화를 존숭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정치사상은 부국이나 강병보다는 인의에 기초한다. 이 외에도 한국전쟁 때 실종된 아들을 찾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 함경도 동문에게 보낸 편지에서 19세기와 20세기 초 함경도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학이 성했음을 알려주는 등 당대의 사회문화적 기록도 담고 있다.
사교재는 기존의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도입되던 시기에,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직접 부딪치며 살았다. 그가 지키려고 노력한 기존 질서 중 하나가 종법질서다. 이 책에서 ‘종중’이란 편목 이외에도 사교재는 종법 관계 글을 많이 썼다. 「최모 문제」에서 사교재는 이것을 최모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인식했다. 최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