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채의진의 인권 투쟁 기록
내가 본 채의진
평생을 건 싸움
나의 선생님 채의진
프롤로그
제1부 1949년에 멈춘 시계
1장 시체 아래 누운 아이
2장 공비나 막으라고?
3장 영원한 우정
4장 신성모 나오시오!
제2부 꺼지지 않은 불씨
1장 서울을 울린 혁명의 목소리
2장 수배령이 내려지다
3장 스승의 길
4장 사라지지 않은 앙금
5장 고통과 외로움을 깎다
6장 운명적 만남
7장 불씨를 지피다
제3부 마음과 마음이 만날 때
1장 의문의 편지
2장 바다 건너 찾은 증거
3장 제주도에 번진 불씨
4장 이심전심
5장 돌아오는 인연
6장 내가 죽어야 말이지
7장 길 잃은 분노
8장 예술로 승화한 아픔
제4부 진실과 화해를 향한 발걸음
1장 특별법 통과요!
2장 누더기 법안과 눈물의 삭발식
3장 하늘을 울린 마음
4장 드러난 진실
5장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제5부 국가라는 적
1장 마지막 전투
2장 국가는 들으라
3장 뻔뻔함도 정도가 있지
4장 기각, 기각, 기각
5장 내 생애 가장 기쁜 날
제6부 잠들지 못한 진실
1장 나의 소원
2장 상처만 남은 길
3장 암울한 시대의 증언자
4장 오호 애재라
에필로그 마지막 울음
평전을 마치며 끝나지 않은 전투
채의진 연대표
참고 문헌
국가 폭력에 맞서 싸운
한국판 체 게바라
‘부수적 피해’. 군이 작전을 수행하는 도중 비무장 민간인이 당하는 재산과 인명의 손실을 뜻하는 군사용어이다. 군은 용서받지 못할 만행을 저지르고도 책임을 면하려고 이처럼 ‘사무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 동족 간의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이야말로 부수적 피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나라 중 하나이다. 광복 직후 이념 갈등이 극에 달해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민간인들은 지옥을 보고 있었다.
1949년 12월24일 경북 지역의 공비를 토벌하던 국군 부대가 문경 석달마을 24가구 주민 127명 중 86명을 마치 사냥하듯 학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인솔자가 상황을 오판한 데 이어 정찰만 하고 오라는 상부의 명령을 어기면서 빚어진 비극이었다. 이 날 확인 사살을 면하고, 형님의 시신 밑에 깔렸던 채의진 소년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졸지에 가족 9명을 잃고 고아가 되다시피 한 채의진의 앞날은 이 날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을 국가 폭력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전사로서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역대 정권은 다른 숱한 국가 폭력 사건과 함께 이 사건 역시 덮어 버렸다. 유족의 끈질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를 무시하고 공비가 저지른 일로 조작했다. 중고교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당국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진상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채의진은 퇴직 후에 본격적으로 이 사건을 널리 알리는 일에 매달렸다. 그는 1980년대 말 영문으로 석달마을 학살 사건 보고서를 작성해 전 세계에 알렸다. 그는 학살 사건이 해결되는 날까지 머리와 수염을 자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이후 허리까지 늘어뜨린 긴 머리, 덥수룩한 흰 수염에 붉은 베레모를 쓴 그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현장이라면 어느 곳에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가 폭력에 맞서 싸우는 한국판 체 게바라의 탄생이었다.
그는 투쟁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숱한 민간인 학살이 결국 개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