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대한민국의 문화 예술을 돌아보면 가히 목포가 그 핵이다. 화수분처럼 나고 자란 곳이 목포다. 한국화를 개척하고 이끈 남농 허건과 서양화의 대가 김환기, 한국 근대극을 개척한 김우진, 소설 문학의 대업을 이룬 박화성, 한국 수필계의 대부 김진섭, 생명을 노래하는 시인 김지하, 한국 평론계의 큰 봉우리 김현, 전원일기 작가 차범석, 승무와 살풀이 춤꾼 이매방, 목포의 눈물 이난영,... 수 백 수 천의 예인들을 여기에 다 넣을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목포 오거리’, 목포 역에서 가까이 있는 이 공간은 목포 문화예술의 자궁이었다. 이곳에 밀집해 있었던 다방과 음식점마다 사람들로 넘쳤고, 으레히 문화 예술가들이 늘상 진쳤다. 달리 전시관이 없었던 예전 이곳 찻집에 시와 그림을 걸어놓고 함께 감상하며 갑론을박 격론을 벌였다. -32쪽
어릴 적 서너시간 씩이나 바다에 나가 모래 펄 깊은 감촉을 즐기며 걸었던 길, 필시 대반동 바닷가였으리라. 지금은 ‘유달유원지’나 ‘유달해변’으로 불린다는데, 어릴 적부터 살아온 목포사람은 대반동 백사장이 친숙하다. 그보다 어린 후배인 나도 70년대와 80년대 친구
와 함께 즐겨 찾던 곳이고, 지금의 내 아내와 연애할 때마다 찾던 곳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엔 해수욕장이 있던 유년기엔 여름날 종종 찾기도 했었고, 청년기엔 봄 가을 오후 늦은 시간이면 1번 버스를 타고 대반동 종점에 내려 거기서부터 아내 손을 잡고 걷고 걸
었던 백사장. 지금의 신안비치호텔부터 해양대학교까지 500여 미터 남짓한 모래사장을 걸어다녔다.
해가 제 하루를 다하며 앞섬을 넘어가던 어스름한 시간의 노을은 사랑하는 연인들의 얼굴에 멋지게도 반사되었다. 맞잡은 손에 힘을 살짝 더 주며 조금씩 빠지는 모래사장을 걸으며 무슨 이야길 할라 치면 금새 막다른 길에 도달해 버렸다. -184쪽
월제 김학래는 교사 문인들 중심으로 “목요회” 동인을 만들어 활동하는 것을 시작으로 “목포교육”, “목문학”, “어린이목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