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내며(죽음을 통하여 생각하는 존엄과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심우기
서문(2021년에 마주 보는 1991년 봄-이원영
제1부 1991년 열사투쟁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1991년 5월투쟁의 민주변혁적 성격과 한국 민주화운동사적 의의(송병헌/잊혀진 1991년, 잊게 한 권력(정준희/로컬에서 1991년 5월투쟁을 다시 보기: 광주지역을 중심으로(김봉국/1988~1991년 대구·경북지역 민주화운동과 1991년 5월투쟁(김상숙
제2부 1991년 열사들의 삶, 그리고 투쟁
야만적인 공권력에 쓰러진 스무 살 청년의 순수와 열망-강경대 열사/“더 바보였던 승희는 먼저 떠났고, 덜 바보였던 우린…”-박승희 열사/‘전태일 형’ 부르고 싶었던 영균이…, 스무 살로 남았다-김영균 열사/“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끝까지 구호 외친 ‘경원대 횃불’-천세용 열사/영안실 벽에 구멍 뚫은 경찰, 그의 시신을 강탈했다-박창수 열사/“기설아 왜 죽겠다는 거야?” 죽음마저 왜곡시킨 유서대필 조작사건-김기설 열사/반쯤 불타버린 종이에 남긴 글 “우리는 끝까지 싸우리라”-윤용하 열사/불길 속 고교생의 외침 “왜 로보트 교육 받아야 하나”-김철수 열사/남긴 것도, 갖고 싶은 것도 하나 없이 정의와 평화를 기도하다-이정순 열사/“아버지, 승리의 그날까지 도와주십시오” 열사가 남긴 마지막 말-정상순 열사/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스물여섯 해 삶과 꿈-김귀정 열사/남과 북이 하나 되는 날, 작은 민들레로 태어나고 싶다-손석용 열사/국제관광지 ‘하와이’가 아닌 삶의 터전 ‘제주’를 지키다-양용찬 열사
제3부 1991년 열사투쟁에 대한 기억과 소회
1991년 5월 피와 눈물의 시간, 분노와 미안함에 가슴 아렸다(이원영/1987년 항쟁은 1991년 5월에 끝났다(홍기빈/<언더커버>, 그리고 1991년 그해 봄날의 기억(안영민/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30년 동안 내 곁에 살아 있는 친구(최현진/패배로 기억되건 말건 승리로 나아가자(김준모/1991년 투쟁과 전교조 세대 “여기, 고등
<열사들이 자기 몸을 불살라가며 외쳤던 민주주의의 회복>
강경대 열사는 백골단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고, 김귀정 열사는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과정에 숨졌다. 살인정권을 규탄하며 분신한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열사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대학생이었다. 그런 학생들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지 말자며 분신한 이정순, 윤용하, 정상순 열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평범한 서민 노동자들이었다. 김철수 열사는 고등학생이었고, 김기설 열사는 재야단체 전민련의 사회부장이었으며, 구치소에서 수감 중 치료차 나온 병원에서 의문의 시신으로 발견된 박창수 열사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다.
그때 열사들이 자기 몸을 불살라가며 외치고자 했던 것은 민주주의의 회복이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지만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건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였다.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후보의 분열로 얻은 군부독재의 승리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듬해 1988년 4월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당인 민정당보다 야당 후보들을 더 많이 당선시켰다. 여소야대 정국이 시작된 것이다. 정국의 주도권은 야권으로 넘어갔고, 재야단체와 대학생들은 ‘양심수 석방’, ‘전두환 이순자 구속’을 외치며 강력히 투쟁했다.
<3당 합당과 내각제 개헌 음모에 맞선 투쟁>
정권이 수세에 몰리던 상황에서 뜻밖의 조치가 벌어졌다. 1990년 1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만나 3당 합당을 선언한 것이다.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는 것을 매스컴에서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칭송했다. 마침내 1990년 5월 민주자유당이 창당됐고, 거대 여당의 독주가 시작됐다.
저들은 공공연하게 내각제 개헌을 말하며 공안통치 속에 일당독재 체제를 갖춰 나갔다. 그런 순간에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대학생들이 투쟁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1991년 5월 투쟁이었다.
연이은 분신 투쟁에 노태우 정권은 당황했다. 정권을 구하기 위해 나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