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렬하게 사랑하고 맹렬하게 싸우는 순수주의자 리디 살베르,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다.
스페인 독재정권에서 벗어나 프랑스 툴루즈 인근의 오탱빌에 정착한 카탈루냐계 어머니와 안달루시아계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리디 살베르는 고향을 떠나게 만든 이데올로기의 싸움, 한때 정의를 위해 싸웠으나 집안에선 폭군인 아버지, 평생 편안하게 느끼지 못한 프랑스어 등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맞서며 쌓인 분노와 격정을 글로 다스려온 작가이다. 평생을 몸담아온 예술과 문학을 향해 느끼는 감정에도 애정과 증오가 양립한다. 오랫동안 사랑해온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이 있는 피카소 미술관의 하룻밤을 독점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마저 그녀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강렬한 저항이었다.
주위의 설득과 긴 고민 끝에 〈걷는 사람〉과의 하룻밤을 수락했지만, 정작 살베르는 오롯이 마주하게 된 〈걷는 사람〉에게서 아무런 감흥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불안감만 커질 뿐이다. 무엇 때문인가.
리디 살베르는 스위스 태생으로 이십대 초에 파리에 정착한 자코메티에게서 이주민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낀다. 예술은 모든 화려함과 풍요로움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라고 여긴 자코메티에 깊이 공감하며, 그런 자코메티의 예술을 침울한 아름다움,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왔다. 그토록 존중하는 마음을 품었던 자코메티의 작품과 대면하고 있는 이 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감동이 일지 않는다. 그 청동 조각상이 자신의 눈앞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밀도 높게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어떤 아찔함도 기쁨도 영감도 느끼지 못한다.
살베르는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을 홀로 지낸다는, 몹시 기대했던 예술적 시도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데에 무력감을 느낀다. 이 귀한 시간에 자신은 왜 예술에 대해 아무 관심도, 아무 욕구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그동안 의식하지 못한 예술에 대한 혐오감이 작동하는 건가.
예술을 향한 애증과 세상을 구원하는 실패의 아름다움이 강렬하게 교차하는 시간.
지나치게 부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