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불행과 불운의 학자군주, 정조
프롤로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굴레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비극적 최후에 대한 상반된 시각
1장 살얼음 밟듯 보내야 했던 동궁 시절
영조와 동궁을 이간질하려는 세력들
위기의 동궁을 지켜준 홍국영
전적으로 믿음을 준 친위세력의 변절
2장 과거청산, 보복의 칼을 휘두르다
즉위 일성,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어머니 홍씨 집안과의 한판 승부
정순왕대비의 오빠 김구주를 제거하다
3장 정조의 학문, 그리고 수신제가
왕세손 시절의 학문연마
수신제가에 성공한 군주
스승의 입장에서 진행한 경연
4장 역모로 얼룩진 집권 전반기
홍계능의 역모와 이복동생 은전군의 죽음
뒤늦게 문제가 되는 홍국영 역모사건
김하재 역모사건의 진실
상계군 이담 역모사건
5장 가까스로 틔운 개혁의 물꼬
‘불세출의 인물’로 극찬 받은 채제공
오랫동안 품었던 꿈으로의 도약
6장 인재에의 갈망
‘문치(文治의 나라’, 제2의 세종대왕을 향한 바람
금난전권을 철폐한 대결단, 신해통공
서얼에게 열어준 관직의 길
7장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 : 천주학의 도래와 문체반정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가는 천주학
경화사족(京華士族과 ‘북학(北學’의 확산
문체반정―서학과 북학,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8장 영남 만인소, 그후 : 시파와 벽파로 갈린 지식인들
왕실 친인척들을 다시 중용하다
혜경궁 홍씨 집안에 대한 정조의 태도 변화
탕평정국을 깨버린 영남 만인소
9장 국시(國是를 바꾸려는 시도
“장헌세자는 억울하게 죽었다”
갑자년 구상의 현실화
‘제2의 홍국영’ 정동준을 중용한 치명적 잘못
정조도 넘지 못한 장벽, 노론 벽파의 뉴 리더 심환지
10장 성공한 인간, 미완의 ‘개혁군주’ 잠들다
기대와 좌절의 정조 24년
한 시대가 무너져 내리던 때
에필로그|
정조는 조선의 국운을 어떻게 좌우했는가?
국가의 개혁과 인간적 고뇌 사이에서 갈등한 비운의 군주
거듭되는 역모 속에 일궈낸 탕평·초계문신·장용영·화성건설도
서학과 북학의 유입이 가져온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에는 무력했을 뿐!
새 시대의 비전보다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한 리더의 최후를 되돌아본다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임금으로 평가되는 정조의 즉위 첫마디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반역을 꾀하는 사도세자(아들와 정권을 내줄 수 없는 영조(아버지, 그리고 눈앞에서 생부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손자, 이 비극의 가족사는 조선 후기 최고의 군주라 일컬어지는 정조의 정신적 토대가 된다. 어떤 자료보다도 『실록』을 재점검하는 저자의 정공법은 개인적 행(幸·불행(不幸이 국가적 문제로 확대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가를 화두로 정조 탐구를 시작한다.
‘임금과 스승은 하나’라는 ‘군사(君師’로서 학문과 정치를 동시에 아우르겠다는 의욕은 넘쳤으나 경연에 불성실해 빈축을 사고, 현란한 언변으로 신하들에게 혼란을 준 정조는 임금 중 최초로 안경을 썼지만 그외 신문물 탐구에는 무심했고, 탕탕평평을 외치면서도 자기편이 될 만한 인물로만 인재풀을 구성했다. 게다가 집권 24년 중 절반은 아버지 복수에, 나머지는 그 뒷수습에 급급했다.
외화내빈(外華內貧. 정조 자신이나 그를 높이 평가하는 후대까지 이 한마디로 일갈하는 저자라 해도 정조가 수신제가에 성공적이었다는 데 이견은 없다. 다만 국왕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치국과 평천하의 경지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해서 성군(聖君으로 평가해서는 안 됨을 주장한다.
사실 정조 시대는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했다. 즉위 1년째 임금이 머물던 존현각에 영조 추종세력이 침범했고, 5년째 정조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틈타 역모가 이뤄졌으며, 6년째 『정감록』 등의 예언서가 성행하면서 임금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태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8년째에는 선왕들을 모신 사당관리가 임금을 욕하는 쪽지를 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