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의 삶과 예술
오지호는 1905년 12월 24일(음력 전남 화순에서, 보성군수였던 아버지 오재영과 어머니 김선군 사이에서 여덟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1921년, 전주고보에서 서울 휘문고보로 편입하여 미술 교사인 서양화가 고희동에게서 지도를 받았고, 이듬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혜석의〈농가〉그림을 보고 유화에 입문했습니다. 1925년, 일본으로 간 오지호는 대학 입시에 낙방했으나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재도전해 도쿄 미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스승인 후지시마 다케시 교수와 도쿄 미술학교 수석 졸업생인 김관호의 작품〈해질녘〉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자신의 그림에 암갈색이 두드러진 것이 일본의 기후와 풍토 때문임을 알게 된 오지호는 빛과 색채에 대한 광학적 효과를 연구하였고, 우리나라 자연과 기후에서 답을 찾아나갔습니다. 6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31년에 귀국한 오지호는 직장을 얻지 못해 예술가로서 잠시 막막한 삶을 살았습니다. 1935년, 친구인 김주경의 도움으로 개성 송도고보의 미술 교사로 부임하여 10년 가까이 개성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그렸습니다. 대표작인〈남향집〉과〈사과밭〉〈도원 풍경〉을 비롯해 1938년에는 김주경과 함께《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애국정신이 투철했던 오지호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았고, 8.15 광복 후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 서양화부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나 편 가르기만 일삼는 미술계에 염증을 느껴 낙향했습니다. 1949년부터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자신의 인상주의 회화 세계를 다져나갔고, 미술계에 만연한 일본의 정서를 없애려고 노력하였습니다.〈무등산〉〈흑산도〉등 고향의 풍경을 하나씩 화폭에 담던 무렵 6.25 전쟁이 터졌고, 오지호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고통보다 고향집 근처에 보관해 둔 작품이 몽땅 소실된 일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이후에 그린〈가을 풍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