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부 아버지와 나; 나의 아버지 장준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다.
6·25전쟁 발발 이후 부산으로 피난 가다.
≪사상계≫를 창간한다.
서울에 올라와 생활기반을 닦다.
≪사상계≫, 민족 정론지로 거듭나다.
4·19혁명 이후 국토건설본부에 참여하다.
5·16군사정변 이후 부정 축재자로 몰리다.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민정 이양을 반대하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나서다.
정치인의 길로 나가 사카린 밀수사건을 파헤치다.
야당 ‘4자 회담’을 이끌다.
옥중 출마하여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다.
아버지가 나를 해군에 입대시키다.
베트남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다.
≪사상계≫, 폐간당하다.
『돌베개』를 출판하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하다.
‘헌법개정백만인서명운동’을 전개하다.
감옥에서 나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퇴원 후 야당 통합에 진력하다.
나의 결혼식장이 시국강연회장이 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혼배성사를 올리다.
약사봉에서 갑작스러운 의문사를 당하다.
아버지의 시신을 안방 안치하고 검안하다.
검찰 측, 실족사로 처리하다
명동성당에서 아버지의 영결식을 치르다.
제2부 나와 아버지; 홀로서기와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
의문사 현장에서 진상 규명에 나서고 추모비를 세우다.
사건 진실을 밝히려다 테러를 당하다.
가족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하다.
말레이시아로 도피성 외유를 떠나다.
싱가포르로 떠나서도 아버지를 기리다.
‘장준하 새긴돌’을 세우다.
싱가포르에서 경제적인 기반을 닦다.
귀국 후 낯선 고국 생활을 시작하다.
귀국 전 진상 규명에 한계를 느끼다.
귀국 후 진상규명에 직접 나서다.
<사상계>를 복간하다.
18대 총선에 나가다.
제3부 민족·국가와 나; 일주명창(一炷明窓
장준하공원을 조성하면서 37년 만에 아버지를 유골로 만나다.
전면적 재조사와 진상 규명에 나서다.
진상규명을 위한 국민들의 관심과 동참을 호소하다.
장준하선생암살의혹규명국
장호권 선생은 자신의 회고록 제1부에서 ‘아버지와 나; 나의 아버지 장준하’라는 제목으로 어머니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었거나 자신이 경험했던 아버지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장호권 선생이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은 칠십여 년 동안에 26년 정도이지만, 군 제대 후 21살부터 5년 동안은 비서처럼 아버지를 측근에서 모셨다. 장준하 선생의 전기문이 여러 권 나왔지만, 아들로서 아버지의 삶을 처음으로 들여다본 것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신촌 집에서 살 때가 짧지만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제2부는 ‘나의 아버지; 홀로서기와 의문사 진상규명활동’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삶을 회고하였다. 1979년 8월 아버지가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무사를 당한 뒤부터 2008년 4월까지 29여 년의 삶을 회고했다. 회고록 전체에서 가장 긴 시간이지만, 내용은 가장 짧다. 제목에서 ‘홀로서기’라고 되어 있지만, 홀로서기를 위한 준비 기간이 아니었나 한다. 아버지가 의문사를 당한 뒤로도 여전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독재정권이 계속되었기에 그는 이 땅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어 망명 아닌 망명의 길을 떠나 해외에서 지내야만 했다. 25년 동안의 해외 생활을 접고 국내에 들어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폐간된 ≪사상계≫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매듭을 풀고자 아버지가 경계했던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총선에 도전했지만 이마저도 이루질 못했다.
제3부는 ‘민족·국가와 나; 일주명창’에서 비치듯 ‘심지 하나가 창을 밝힌다’라는 글귀처럼 불의한 정권에 맞서 ‘하나의 심지’, ‘하나의 불꽃’처럼 사셨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아버지 주검의 진실을 밝히고자 37년 만에 관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불효자로서 한겨울에 맨발로 아버지께 술을 올렸다. 아버지를 다시 묻고는 시묘살이도 했다. 이후 장호권 선생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실규명을 위해 애썼고, 인권·평화·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진정한 ‘홀로서기’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