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둘-벤투와 나-을 점점 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라보는 행동, 눈으로 질문하는 행동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내 생각에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끌어 가는 어딘가, 혹은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우리가 공유했기 때문이다.”(본문 p.12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
철학자 스피노자(B. Spinoza.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유대 혈통인 스피노자(바루흐, 베네딕투스 혹은 벤투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는 철학의 외부에서 철학을 탐구했다. 데카르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은 데카르트를 비판하며 정립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면서, 데카르트의 이분법을 넘어선 일원적 세계관을 사유했다. 스피노자는 짧은 생애 동안 지치지 않은 열의로, 읽고 사색하고 토론하며 글을 썼다. 철학적 활동 외에 렌즈 세공으로 생계를 이어 간 그는, 종종 드로잉을 하기도 했다. 항상 스케치북을 지니고 다녔는데, 현재 전해 오고 있지는 않다.
미술평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여든을 넘긴 나이인 지금도 농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존 버거(John Berger. 오랫동안 존 버거는 스피노자의 스케치북을 찾는 상상을 했다. 놀라운 명제를 남긴 철학자 스피노자가 두 눈으로 직접 관찰했던 것들을 살펴볼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느 날 아름다운 스케치북을 선물받은 존 버거는 거기에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벤투의 스케치북(Bento’s Sketchbook』이다.
사소함의 연대가 갖는 힘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존 버거는 세심한 눈길로, 그의 일상과 주변인물, 그들과 함께하는 작은 경험 들을 담아낸다.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삶의 편린들. 버거는 그것들을 글 혹은 그림으로 지면에 우아하게 옮겨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