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신문
서문_5
제4권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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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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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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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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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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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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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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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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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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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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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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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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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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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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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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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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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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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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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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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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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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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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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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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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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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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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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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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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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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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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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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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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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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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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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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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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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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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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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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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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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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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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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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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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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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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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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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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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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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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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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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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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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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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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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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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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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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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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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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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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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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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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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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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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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권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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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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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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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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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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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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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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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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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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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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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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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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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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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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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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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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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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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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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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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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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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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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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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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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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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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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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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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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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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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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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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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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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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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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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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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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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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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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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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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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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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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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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
* 협성회 회보의 발간
1896년 11월 서재필은 협성회를 조직하여 학생들에게 찬반 토론을 훈련시켰는데, 이승만은 이 협성회의 창립멤버였다.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이 협성회를 학교 밖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1897년 12월 상순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 제29회 공개토론회에서 회보 발간을 결정하고, 이듬해 1월 1일 학교 구내에서 창간하였다. 창간시 신문을 전담한 회보장(會報長은 양홍묵(梁弘默, 주필에는 이승만이 취임하였다. 신문의 구성은 4면으로, 1면에는 논설을 싣고, 다음에는 국내의 소식(내보과 외국의 소식(외보, 잡보와 협회의 소식, 그리고 짧은 광고를 실었다.
최종호가 되는 제14호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논설을 게재하였는데, 논설에서는 학문의 필요성, 자기직분에 충실할 것, 아동교육의 중요성, 매관매직과 탐관오리의 격퇴 등을 주장하였다. 1898년 3월 19일에 주간지를 일간으로 발간하기로 결정하고, 4월 9일부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의 발간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협성회회보>의 발간에는 처음부터 순 한글로 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문자 생활을 한자 중심으로 하던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이승만의 사회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한자를 모르던 대중들을 위한다는 뜻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원래 한자말을 괄호 안에 되살렸는데, 한자말을 이해하는 것이 문장의 뜻을 명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일신문의 발간
1898년 3월 19일에 협성회 통상회 석상에서 주보로 발행되던 신문을 일간으로 변경한다는 방침이 결의된 후, 1898년 4월 9일에 제1호가 발행되었는데, <내외국 시세 형편과 국민에 유조한 말과 실제의 소문을 많이 기재할 터이니, 목적도 극히 중대하거니와 우리 회원이 일심 애국하는 지극한 충성의 간담을> 보아 달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발간되기 시작한 <매일신문>은 유영석 사장, 최정식 기자 등과 함께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일간신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