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태평양잡지
1. 1913년 11월호
국문은 조선의 대복_17 / 추풍객회_24 /
내치자주(內治自主_26 / 뉴욕과 땅속 세계_31 /
파나마운하_37 / 파나마에 대한 추후 소문_43 / 하멜의 일기_47
2. 1914년 1월호
송구영신_52 / 새해 지키는 풍속_58 / 거듭나는 사람_64 /
경시총감 명석과 교인 악형_70 / 일본 전 총리대신 계태랑_78 /
손일선 편지_82 / 필리핀 독립_87 / 하멜의 일기 제3차_95
3. 1914년 2월호
미국의 공화사상_99 / 미국 헌법의 발전_109 /
하멜의 일기 제4차_120 / 본 잡지의 주의_127 / 한일교회 합동 문제_133
4. 1914년 3월호
낙관적 주의_141 / 발칸반도_147 / 걱정 자루_153 /
몽고와 일아 (日俄 양국_155 / 한국 선교사들에게 경계_157 /
한국과 청국 모핀 악습_163 / 청국 북경소문_167 /
하멜의 일기 제5차_171 / 사진혼인_177
5. 1914년 4월호
사상의 능력_184 / 조선에 세 가지 없는 것과 세 가지 있는 것_189 /
세상 시비_196 / 하멜의 일기 제6차_201 / 애국가와 찬미가_207
6. 1914년 6월호
하와이 군도_213 / 하와이 섬 여행기_221 / 미국의 중대 문제_230
7. 1923년 3월호
한족의 단합이 언제_234 / 남북론_241 / 공산당의 당부당_247
8. 1923년 7월호
기호파가 무슨 파냐_251 / 통일의 한 기회_255
9. 1924년 7월호
한인들은 어찌 하려는고_259 / 보족(補足 경쟁_264 /
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_267 / 평민시대_269 /
의정원에 보낸 대통령의 공함_272 / 국무원 제공에게_275 /
외국인과 혼인_277 / 국무원에 보낸 공함_282
10. 1924년 10월호
제일 급한 것_285 / 공화주의가 일러_289
* 협성회 회보의 발간
1896년 11월 서재필은 협성회를 조직하여 학생들에게 찬반 토론을 훈련시켰는데, 이승만은 이 협성회의 창립멤버였다.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이 협성회를 학교 밖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1897년 12월 상순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 제29회 공개토론회에서 회보 발간을 결정하고, 이듬해 1월 1일 학교 구내에서 창간하였다. 창간시 신문을 전담한 회보장(會報長은 양홍묵(梁弘默, 주필에는 이승만이 취임하였다. 신문의 구성은 4면으로, 1면에는 논설을 싣고, 다음에는 국내의 소식(내보과 외국의 소식(외보, 잡보와 협회의 소식, 그리고 짧은 광고를 실었다.
최종호가 되는 제14호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논설을 게재하였는데, 논설에서는 학문의 필요성, 자기직분에 충실할 것, 아동교육의 중요성, 매관매직과 탐관오리의 격퇴 등을 주장하였다. 1898년 3월 19일에 주간지를 일간으로 발간하기로 결정하고, 4월 9일부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의 발간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협성회회보>의 발간에는 처음부터 순 한글로 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문자 생활을 한자 중심으로 하던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이승만의 사회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한자를 모르던 대중들을 위한다는 뜻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원래 한자말을 괄호 안에 되살렸는데, 한자말을 이해하는 것이 문장의 뜻을 명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일신문의 발간
1898년 3월 19일에 협성회 통상회 석상에서 주보로 발행되던 신문을 일간으로 변경한다는 방침이 결의된 후, 1898년 4월 9일에 제1호가 발행되었는데, <내외국 시세 형편과 국민에 유조한 말과 실제의 소문을 많이 기재할 터이니, 목적도 극히 중대하거니와 우리 회원이 일심 애국하는 지극한 충성의 간담을> 보아 달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발간되기 시작한 <매일신문>은 유영석 사장, 최정식 기자 등과 함께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일간신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