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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그럼에도 일본인은 원전을 선택했다
저자 아사히신문 취재반
출판사 호밀밭(A일원화
출판일 2019-07-31
정가 16,000원
ISBN 9791196705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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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희망’의 탄생
“5시 23분, 임계에 도달했습니다” / 원전 추진자의 통탄 / 원전은 ‘역병’이다 / 다른 ‘원전 소재 지역’에 없는 풍경

1장 ‘원자력 무라’ 제1호
촌장의 결단 - 단독으로 유치 / 촌의회도 찬성 - 발전을 믿고 진정 / 촌(村 주민 계몽 활동 / 뜻밖의 원연 후보지 / 현(縣의 유치 전략 / 치열한 유치 경쟁 / 뒤집힌 ‘최적지 다케야마’ / 담당 대신, 각의 불참 / 몇 번이나 ‘도카이무라’ 주장 / 이바라키와 쇼리키를 연결하는 실 / 수상을 노리고 미국을 이용 / ‘발전(發電’을 향한 집념

2장 도카이무라에 불이 켜지다
너무 일렀던 ‘반대파’ / 의문의 목소리가 확산되지 않다 / 학생, 주민 의식조사를 하다 / 주민의 70퍼센트가 위험을 인식 / “솔직한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 “폭발 걱정 없다” / 원자력 현(縣 주민답게 / 과학기술의 ‘선(善함’을 선전 / 언론 보도가 만들어낸 원자력 붐 / 지역신문도 적극 추진 / 눈부신 ‘평화적 이용 박람회’ / 미디어의 계몽 캠페인 / 학교에서 홍보영화 / 연구원 채용의 불투명함 / 불러 모아진 1기생 / 이카루스들의 여름 / 55년 만의 ‘총평’

3장 원전의 선구
‘철의 여인’이 내려오던 날 / 발전을 밀어붙이는 쇼리키 / 쇼리키가 눈독 들였던 저비용 / ‘영국 방식’이 신문 톱기사 / 반대파도 포함시킨 시찰단 / 원전 판매, 영국 측의 의도 / 지진 대책 ‘완전한 맹점’ / ‘버림돌’이었던 영국 원자로 도입 / 영국 원자로 반대파의 변심 / 축적된 기정사실들 / ‘원산회의’의 원류 / ‘혈통’ 묶어 대동단결 / 조직 확대해 홍보 추진 / 영국 원자로 도입 논쟁 / 쇼리키와 고노 ‘여름의 진영’ / 드러난 ‘모순’

4장 깔린 레일
부지는 애초부터 도카이무라였다 / 비공개 시추 조사 / 원전 계획, 애매모호한 기억 / 도카이무라 전제 의혹 / “도카이무라로” 지사의 열의 / 지역신문의 매서운 논진 / “안전한가” 지적 이어지다 / 원전
? 일본 원전의 첫 불을 밝힌 담당자부터
이후 실무진을 총 망라한 인터뷰!

일본의 원전 역사는 1957년 8월 27일, 도카이무라에 있는 일본원자력연구소에서 원자의 불이 처음 켜지며 시작한다. 당시 언론들은 이 ‘위업’을 대서특필하며 칭송했다. 그러다 1999년, 도카이무라에서 일본 첫 원전 사고가 일어나 두 명이 사망한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의 엘리트들은 원전에 대해 방심했고 이때의 충격과 회환은 그로부터 12년 뒤 훨씬 더 큰 참사로 나타난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원전 중대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만 년에 한 번’ 이라고 큰소리쳤던 이들 중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원전이 들어서고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원자력의 혜택을 받아온 도카이무라의 촌장 무라카미 다쓰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전 머니(money는 일시적으로는 지역을 풍족하게 해주지만, 주민에게서 자립 및 자율의 희망과 긍지를 빼앗아 결국에는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거액의 자본에 영혼을 팔아 일장춘몽을 꾼들 주민이 풍족해지기는커녕 고향까지 잃을지 모릅니다. 원전은 ‘역병’입니다.”


? 일본 최초의 원전을 구상하고 만들어낸 이들이
수십 년이 지나 털어놓은 증언

이 책은 일본에 처음 ‘원자의 불’이 켜진 도카이무라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는 동시에,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고노 이치로(河野一?,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 등 1955년 체제하 중앙 정계 중진들의 움직임과 원자력 개발을 둘러싼 재계의 의도, 언론 보도 검증 등을 통해 일본 원자력 정책의 원점을 파헤친다.
아시히 신문사 특별취재반은 생존자 증언과 ‘원자력의 아버지’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의 최측근으로부터 입수한 새로운 자료를 철저히 검증하며 일본 원전의 처음부터 지금까지를 세세히 기록했다.
일본에서 원자력에 대한 논의는 이전부터도 진행되고 있었지만 특히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논쟁이 더욱 거세졌다. 후쿠시마 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