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글
감사의 글
[제1부] 우리나라에 서양화의 토대를 마련한 선구자
나라 잃은 슬픔, 그림으로 풀다
서양화 명칭 하나만 알고 입학한 동경미술학교
현지 르포 - 100년 후 도?쿄에서 서양화 선구자의 자취를 더듬다
화가의 길, 선각자의 사명 - 귀국 이후 서화협회 활동
간송 전형필의 평생 나침반이 된 고희동
한국 화단의 상징적 존재 고희동 - 광복 후 미술계와 사회활동
고희동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원서동 가옥
구한말 신지식인, 고희동의 부친 고영철
[제2부] 나의 아버지 춘곡 고희동 화백
창씨개명을 거부한 고희동
6·25 전쟁과 고희동 - 아버지 수염을 자른 딸!
1·4 후퇴와 부산 피난살이
폐허에서 건진 고희동의 금강산 그림
《정자관을쓴자화상》전시장에 걸리다 - ‘동경미술학교43인의얼굴전’
고희동과 4·19, 그리고 5·16
모든 것을 내려놓은 노년의 삶
춘곡 고희동 연보
출판사 서평
100년 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는 서양화를 배우러 유학 온 한국인 학생이 있었다. 구한말 유력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뒤 고종황제의 측근에서 근대화 업무에 참여한? 궁내부 관리 고희동이다.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관료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새로운 그림의 세계로 인생행로를 바꾼다. 서양화 공부를 마친 뒤 귀국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일제에 맞선 조선의 범미술 단체의 중심인물로 활동한다. 광복 후에는 한국 화단의 상징적 존재로서 문화계 발전과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
100년 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는 서양화를 배우러 유학 온 한국인 학생이 있었다. 구한말 유력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뒤 고종황제의 측근에서 근대화 업무에 참여한 궁내부 관리 고희동이다.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관료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새로운 그림의 세계로 인생행로를 바꾼다. 서양화 공부를 마친 뒤 귀국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일제에 맞선 조선의 범미술 단체의 중심인물로 활동한다. 광복 후에는 한국 화단의 상징적 존재로서 문화계 발전과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생을 바친 그의 삶을 다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을 에디터출판사에서 펴냈다.
이 책의 제1부에서는 고희동의 일대기를, 제2부에서는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그의 막내딸 고계본 여사가 기억하는 고희동 생전의 삶과 인간적인 면모를 전한다. 고희동의 일대기를 엮는 과정에서 저자는 2013년 도쿄 현지 조사 중 고희동의 유학 시절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동경미술학교의 수업 장면과 졸업사진 등을 발견하여 처음으로 책에 소개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자리매김이 아직 크게 부족하다. 인간 고희동에 대해서 더 많은 조명이 필요하다. 단순히 최초의 서양화가로서만이 아닌 민족주의자로서 고희동이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2015년은 고희동 서거 50주기가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