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해설-거대한 사건 속 민초들의 미시사 (서찬휘, 만화 칼럼니스트, 여행 작가
4.3과 일제강점기 제주의 고난에 비해 고려 말의 제주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 역사는 이 시기를 오랑캐를 무찌른 ‘승전의 기록’으로 기억하려 한다.
이 작품의 도입부에도 등장하지만, 제주 애월 해안로에 자리한 다락쉼터 즈음에는 비석 하나가 백전백승의 명장 최영 장군과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을 형상화한 석상 사이에 서 있다. 비석에 새겨진 문구는 “애월읍경은 항몽멸호의 땅”, 이곳 애월이 몽골에 맞서고 오랑캐를 없앤 곳이란 뜻이다. 이는 삼별초의 대 몽골 최후 항쟁지 항파두리와 목호 잔당과의 싸움에서 최영이 승기를 잡은 새별오름이 애월읍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호 토벌이 과연 ‘우리’의 승리였는가에 관해 정용연 작가는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항몽멸호’라는 표현은 고려가 몽골 오랑캐에게 굴복한 역사가 굴욕이고 이에 끝까지 맞선 삼별초는 항거한 영웅들이며 이후 원 나라가 망하고도 남아 있던 오랑캐들을 끝내 멸절시킨 역사는 영광이라는 어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오랑캐에게 침략당했던 고려 입장에서는,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지금에 이른 우리에게는 민족의 자주 의지를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역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한데 조금 달리 놓고 보면 이 관점 어디에도 정작 ‘그 시기 제주에 살던 사람’이 없다.
‘오랑캐를 멸한’ 이 사건을 우리의 영광으로 해석하려면 최영을 주인공으로 삼아 영웅전을 만드는 편이 쉬웠을 터다. 하지만 정용연 작가는 원이 패퇴하고 제주 땅 안에 고립된 목호들 중 하나인 백호장 ‘석나리보개’와 유배 온 고려 관리 정한영의 손녀딸로서 석나리보개의 아내가 된 ‘버들아기’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 둘은 실존 인물이면서 한편으로는 시대 변곡점의 최전선을 장식하는 영웅이나 적장이 아니라 조연쯤 되는 인물들이다. 석나리보개와 버들아기는 각각 목호와 고려 여자로 만났으나 서로 뭍사람 아닌 섬사람으로 자라온 세대다.
한데 제주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