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학은 묻는다, 세계를 손수 파낸다”
“문헌학이라는 이름은 로고스─언설, 언어 혹은 공표─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호의, 우정, 사랑을 뜻한다. 이 명칭에서 필리아에 해당하는 부분은 일찍이 망각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문헌학은 점차 로고스학, 즉 언어에 관한 학문, 다시 말해 박학으로 간주되었고, 급기야 언어 자료, 특히 문헌 자료를 다루는 학문적 방법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헌학은 지식의 언어보다 앞서 그것에 대한 소망을 먼저 일깨우는 운동, 그리고 [기존의] 인식 속에서 [정말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 제기하는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운동이다.” (17쪽
그렇다면 문헌학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저자는 문헌학의 특성과 대상 등에 관한 명제를 부단히 제시하지만 문헌학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문헌학은 주어진 언어를 넘어서는 말하기의 불안정한 운동이다. 문헌학은 통용되는 규정에 저항하고 질문한다. 만약 문헌학이 어떤 주장을 내세운다 해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계속 질문하기 위함이다. 질문하기 속에서 모든 확실성은 언어에 내맡겨지며, ‘언어’와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 때문에 언어는 척도가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척도를 찾을 수 없는 문헌학은, 횔덜린의 언어가 그렇듯 자유로운 리듬 속에서 말할 수 있게 된다. 슐레겔의 표현대로 “모든 선을 끊고, 모든 원을 폭파하며, 모든 점을 뚫고, 모든 상처를 찢는” 것이 문헌학적 실천의 길이다. 즉 규정된 형태로 실행될 수 있다 해도 결국 문헌학은 비-규정한다. “문헌학이 ‘너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때 느끼는 당혹감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구원적 규정을 기대하는 여느 분과학문이 으레 한 번씩 앓고 지나가는 홍역 같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또 결코 알 수 없기에 느끼는 당혹감, 바로 이것이 문헌학”이라는 말 또한 이 맥락에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틈새 없이 촘촘한 설